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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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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4일 21시 52분 등록

초등학교 때 읽은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과 중학교 때 읽은 시집은 부부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았다. 교과서의 단편적인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마련이지만, 어릴 적 읽은 좋은 책 한권은 두고두고 되살아나 삶의 위기에서 다시 빛을 발했다. 십대 책과의 좋은 기억이 지금 온가족 함께 책 읽기를 실천하게 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스스로 읽을 책을 선정하고 지속적으로 읽어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형이나 오빠, 언니나 누나처럼 손위 형제자매가 이끌어 주면 좋으련만, 요즘같이 한 자녀 가족이 대부분인 경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가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중학교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고나서 더욱 절절하게 그리운 나의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다. 막 교생실습을 마치고 처음 담임을 맡은 이십 대 중반의 열정 넘치는 국어 교과 선생님이었다. 선생님께선 그 시절 나에게 한국 근현대 소설을 한 권씩 빌려주셨다. 


염상섭, 현진건, 이태준, 채만식, 김유정, 이효석, 이상, 김동리, 나도향, 황순원, 김승옥, 하근찬…….  


“염상섭! 염상섭을 읽어야 돼!”라고, 특히 염상섭의 작품 읽기를 강조하셨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면 나는 헌책방에서 그 책을 사서 나만의 비밀책장에 꽂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자, 선생님께선 이제 세계 문학을 읽어야 할 때라고 하시면서 헤르만 헤세 <지와 사랑>(지금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앙드레 지드 <좁은 문>,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등을 권하셨다. 한국 문학과 달리 세계 문학은 읽기 어려웠다. 발음하기 어려운 등장인물 이름과 낯선 지명들은 나를 주눅 들게 했고,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했기에 책 속 활자만 읽어낼 뿐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혹시 “어디까지 읽었어?”라고 하실까봐 슬금슬금 선생님 눈빛을 피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벽지나 다름없었던 엄마의 책장이 눈에 들어왔던 것도 그 무렵이다. 세상에, 엄마의 책장에 헤르만 헤세가 있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네루의 <세계사 편력>, 박완서의 소설 몇 권...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줄이고 줄였지만, 마지막까지 엄마 곁에 남은 책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또한 태어나 줄곧 같은 방을 썼지만 무슨 책을 읽는지 관심 없었던 고등학생 언니의 책장을 그때서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문학에는 1도 관심이 없어 보였던 이과성향 언니의 책장에 시집이 꽂혀있었다! 내 인생 시집,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도 그때 언니 책장에서 처음 만났다. 언니도 시를 좋아했던 걸까?


교복과 여관의 시기, 엄마와 언니에게 그 책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했지만 실제로 물은 적은 없다. (여태까지!) ‘가족끼리 책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글거릴 만큼 어색했다. 가끔 고기가 먹고 싶다거나 문제집을 사야한다는 말은 했지만 헤르만 헤세나 장정일에 대해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온가족이 가까이에 반짝이는 별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머나먼 별들을 좇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독서를 이어갔던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선물을 내미셨다. 책 한 권과 빨간색 양말 한 켤레였다. 교복에 흰 양말과 검정색 구두만 착용할 수 있던 때였다. 머리카락도 귀밑 3센티가 넘으면 잘리고 마는... 그렇다면 빨간색 양말은 과연 누굴 위한 것인가?


“정은아, 가끔 교복 밑에 빨간 양말도 신을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받은 책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89년 초판 1쇄본 범우사 <압록강은 흐른다>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가 읽고 남편이 읽고 큰아이도 읽었다. 지금껏 내 인생 시집이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듯 내 인생 소설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다. 중학생일 때 처음 만난 이 책들은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중학생 큰아이를 보면서 자주 교복과 여관의 시기가 떠올랐다. 좋은 선생님과 좋은 책 덕분에 그 시기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중학생도 책 권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 아이가 처한 상황에 공감하며 그 아이가 좋아할만한 책을 권하는 경우라면 말이다.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 한 번, 사춘기에 또 한 번 크게 두 번 성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시기에 상관없이 변화 발전을 거듭한다. 중학생 아이와 사십대 중반을 달리는 부부가 함께 책을 읽기로 했다. 어색함을 걷어내고 아이에게 책장의 책들을 소개해 주기로 마음먹는다. 아이가 읽어내기 어려운 책을 권할 때는 배경지식을 알 수 있는 책을 먼저 권하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더욱 나답게 할 빨간 양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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