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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4일 09시 34분 등록
지난주는 처음으로 수요편지를 빼먹었네요. 화요일 점심을 잘못 먹은게 탈이 나서 수요일까지 끙끙 앓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나 제 편지를 기다렸을 분도 있을지 몰라서 사연을 먼저 전합니다 ^^;

얼마전 첫눈도 오고, 연말이라 거리 곳곳 크리스마스 장식도 보이고, 분위기가 들뜰 시기입니다. 직장에서는 연말 성과에 관련한 가지가지 양상들이 목격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며칠전 업무평가표를 작성하면서 마음이 숙연해지더군요. 한해 성과가 좋지 않았다면... 몇 달 전에 완료가 되어야 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면 들뜬 연말 분위기 대신 스트레스만 만땅인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이미 마무리가 되었어야 할 프로젝트와 하루하루 싸우며 연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늦은 저녁 사무실에 앉아있다가 문득 삶은 허상과의 투쟁이 아닌가 하는 개똥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상이란 실제 없는 것이 보이는 것 - 허깨비라고도 하죠 -  또는  실제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들이 실재(實在)와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다'라는 행위는 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입니다. 다른 감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분자 하나하나가 모여서 장미향이 되기도 하고, 쓰레기 냄새가 되기도 합니다. 뇌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뇌가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허상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이 모든 세상이 단지 뇌의 화학적 작용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지각의 매체가 되는 인간의 신체라는 것조차 없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보면 병 안에 들어 있는 1.7kg의 뇌에 수많은 신호선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에 불과한데 그 뇌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마치 스스로가 몸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죠. 하지만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면 그 의심하는 주체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데카르트에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뇌가 나인지, 또는 뇌는 내가 가진 신체의 일부인지 여부는 사실 별반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 안에 뇌밖에 없는 유리병이든,  매트릭스 시스템에 들어 있는 비트(bit)의 덩어리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가 보고 느끼고 맛보는 이 세상이 오직 경험할 수 있는 전부인데 말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잘 판단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설령 이 세상이 허상이라 하더라도, 그 허상 속에서 내가 보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보며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저 스스로에게 이 세상과 지금 이 순간을 똑바로 보고 있는지 자문해봅니다. 듀얼 모니터 화면 프로그램 에디터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프로그램 코드들, 깨알같은 영문과 기호들이 기어다니는 데이터시트(datasheet) 문서들, 이게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 프로그램 코드가 실행되어서 조그만 디바이스안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제가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꼭꼭 숨어있을 시한폭탄과 같은 프로그램의 버그가 제겐 이 세상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근심덩어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제 세상의 전부가 아니죠. 단지 직업적으로 겪는 일상과 풍경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주는 압박이 크면 커질수록 이런 것들을 세상의 전부로 착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제가 보고 있는 것은 화면안의 프로그램 코드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코드의 오류가 만들어내는 버그도 아닙니다.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이슈가 신기루처럼 사라져서 내일이라도 이 네버엔딩 프로젝트가 끝나는 미래의 순간입니다.
또한 보고 있는 것은 모니터의 창에 비친 한 가정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한 직장인의 얼굴입니다.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숨어있는 코드의 버그가 아니라,  실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건사고들입니다.
헛된 기대
암울한 비관
두려운 미래라는
허상을 마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들이 스스로에게 억압을 만들어내며, 현재에 집중하지 못 하게 만듭니다.
단순한 예시를 들었습니다만, 우리의 일상에는 생각이 만들어낸 착각 - 허상들이 넘쳐납니다.

지금껏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임원들을 보아왔습니다. 임원들은 대부분 능력자들이죠. 성과를 냈으니 임원이 된 걸 겁니다. 대기업에서부터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임원이라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실패를 끔찍하게 두려워했습니다. 안 그래보이는 척 할뿐이죠. 임원은 계약직입니다. 단기 실적에 대한 압박이 엄청납니다. 한해 농사를 망치면, 다시 밭을 갈아엎고 재기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 어렵습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경쟁사와 싸우고 유관부서와 싸웁니다.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일겁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실패로 간주됩니다. 실패자로 낙인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성공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성공이 또다른 두려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성공의 늪에 빠지고 싶나요? 능력이 있고 성과를 낸다 하더라도  NO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사회와 조직이라는 곳에 있다보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그런 노선에 올라 타게 됩니다. 그러면서 허상과 싸우느라 삶을 소모합니다. 허상은 욕망으로부터 옵니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욕망은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불안이나 슬픔의 원천이라면 그 욕망은 자신의 삶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욕망은 타자로부터 옵니다. 자신의 성공을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것은 비본질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그냥 내려놓기란 말처럼 쉽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본질적 삶의 폐해를 깨닫고 있다면 언젠가는 본질적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허상이 아닌 실재와 함께 하는 삶 말입니다.  저역시 지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한 것처럼 질문을 품고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해답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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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8 19:47:25 *.169.230.150

저로서는 작은 통찰이 있은 후에 생각할 때 

이렇게 가까이 진리가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작은 깨달음이 있고 나서 지혜로운 스승들의 말들이 살아서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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