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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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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1일 09시 16분 등록
이제 2022년도 딱 열흘 남았습니다. 여러분께 드렸던 마음편지도 이번 편지까지 마흔일곱통이네요.  오늘은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라는 책에 보면, 국내 종교학계의 여러 석학들과 불가의 스승들이 깨달음에 대해 말합니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말이죠. 오늘은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소개하도록 할께요.  깨달음이 궁극이 하나이건 여럿이건간에, 오늘은 불교적 관점에서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책의 서두에서 안국선원장인 수불스님은 깨달음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혹한 상태에서 깨달음을 두고 '궁극인가, 과정인가'하고 묻게 되겠지만 실제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면 그런 물음은 단지 분별망상에 불과하다고 스님은 말합니다. 실제 깨달음 없이 깨달음에 대해 이런저런 논의를 하는 것은 헛된 관념의 향연일 뿐이라는 거죠. 저는 깨달음은 죽음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경험하지 않아도 논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부질없는 일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없듯이 깨닫지 못 한자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모두 분별망상일 수 있습니다. 죽음과 달리 깨달음은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신비주의 연구가 윌리엄 제임스는 신비체험이 수동성, 일시성, 말로 표현할 수 없음, 앎의 특성이라는 4가지 특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신비적 합일 체험은 체험자가 뜻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수동성),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일시성), 체험이 아니고 얻을 수 없는 앎을 주지만(앎의 특성), 그 앎의 내용을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말로 표현 못 함)는 거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자꾸 말로 글로 표현하고 이야기하려고 하니 난감하게 되는 거죠.  불교적 깨달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화여대 철학과 한자경 교수는 깨달음을 기존의 앎을 성립시켰던 인식틀 자체를 알아보는 앎, 그래서 세계를 기존의 앎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보게 하는 앎으로 정의합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인식틀에 따라 세상을 아는 것은 그냥 앎이고, 그 인식틀 너머로 나아가 그 인식틀의 정체를 확인하고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앎을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한자경 교수는 깨달음을 깨달음 1과 깨달음 2로 나눕니다. 깨달음 1은 내가 안경(인식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그 안경을 벗어 안경의 정체 및 그 안경을 통해 보여진 세계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 2입니다. 한교수는 깨달음 1은 자신의 본성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돈오頓悟로 보고, 깨달음 2를 그 자리에서 다시 그 본성을 가리는 장애를 서서히 제거해 나가는 점수漸修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곧 열반이라고 보죠. 열반은 모든 조건과 인과관계를 소멸한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은 열반뿐만 아니라 열반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진리를 알게 되는 순간순간의 과정이 깨달음의 확장적 의미입니다. 그럼 답이 나온건가요? 깨달음은 궁극이자 과정이라는 거죠. 돈오만이 깨달음이 아니라 점수 또한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 틱닛한 스님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깨달음이 바로 길이라고 틱닛한 스님은 말하죠.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정준영 교수는 이 책에서 초기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성취가 열반과 동일시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 깨달음에 대한 접근은 열반의 성취라기보다 번뇌의 제거에 초점을 맞춥니다.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숲으로 가려진 오래된 도시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열반은 원래 있는 것이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열반은 노력해서 새롭게 짓는 것이 아니라, 번뇌라는 숲을 제거해야만 보이는 것입니다. 즉, 견성(본성)성불인 것입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보이지 않던 것, 그 위에 쌓였던 먼지를 제거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부릅니다. 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자성을 스스로 제도한다는 것이 바로 본래의 자성청정심을 말하며, 이 자성청정심의 작용이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자성청정심이 본디 나라는 것이 선종의 핵심입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천국의 입구라는 예수의 말과도 같습니다.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의 MBTI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삼라만상에 연결되어 있는 근원적인 존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견입니다. <돈오입도요문론> 에서는 보되 보는 바가 없음을 정견이라 합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되 보는 바가 없다고 할까요? 일체의 색을 보고도 싦음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본래의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도를 닦는다는 것은 자신을 닦는 것이고,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잊는 것입니다. 잊어야 하는 자신은 집착과 에고인 거죠. 지난 편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비본질적 삶은 집착과 에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본질적 욕망을 내려놓은 삶, 본질적삶으로의 회귀,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겠지요.

남은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다음 주에 올해 마지막 편지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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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8 20:04:02 *.169.230.150

깨달음에 관한 글이 이어지고 있어서 저의 소견을 적습니다. 

저는 운동심리학의 한 분과인 운동학습과 제어(Motor learning & Control) 를 전공했습니다. 현장 연구자 출신이기 때문에 부전공으로 코칭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로서의 저의 견해는 그랬습니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운동생리학적 기전과 운동역학적 기전을 신경학적 근거와 형태 심리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반응체계.' 였습니다.

 

형태주의 심리학에서 실재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들의 관계와 의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동양에서는 실재는 혀상이며 영원한 실체는 유일하다라고 말합니다. 동양의 고전속에 나오는 유일무이나, 진아, 법륜같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유일하며 상황과 관점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든 것은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도 같습니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여 방대한 신학 이론의 체계를 수립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인간적인 수준에서의 정립을 위해서 시도한 것이 그의  스콜라 철학의 근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대철학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가 제시한 명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였고 서울대의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Consilience)을 번역하면서 명제로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narro, Ergo Sum) 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는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한 때 개똥철학으로 취급 받았던 저의 통합적인 접근 가설은 현장 실무자 출신으로 연구자인 저의 연구와 실무에 임하는 근간이 있었습니다. 선수는 (반응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며 결과는 성패로 이어진다.” 라는 명제가 곧 그것입니다..

이는 제가 50 여년을 검을 통한 훈련과 수양, 학습과 연구로 얻어진 작은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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