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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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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일 08시 58분 등록

그러면 어떻게 해야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때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허우적거리는 행동을 멈추고 마치 늪을 끌어안듯이 엎드려서, 가능한 수평으로 최대한 넓게 몸을 늪에 밀착시킨다. 그런 다음 천천히 낮은 포복을 하듯 기어 나온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믿는 무가치감의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유사한 전략이 필요하다. 속으로는 자기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무가치감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삶을 체념하는 방식으로는 무가치함의 늪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다. 저항하든 체념하든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무가치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늪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먼저 무가치감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무가치감과 친해질 때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서 친해진다는 것은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해도 어쩔 수 없이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인 무가치감의 연구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끔찍해서 도망치고만 싶은 그 느낌은 몸의 어떤 부분에서 어떤 양상으로 일어나는지, 주로 어떤 순간에 활성화되고 약화되는지 등을 마치 무가치감이라는 늪의 생태를 연구하는 생태학자라도 된 듯 정성스레 살피고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빠져있는 이 수렁이 그리 끔찍한 곳이 아님을 눈치 채게 된다


비로소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아귀처럼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던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벗어나고만 싶던 어둠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 다시 말해 나 자신과의 관계 회복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관계회복을 위해 거창한 치유의 과정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둠이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어둠의 소리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숨의 결과 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나를 이루는 것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수렁은 조금씩 땅으로 변해갔다. 그 안에 품은 모든 것을 양분으로 간직한 채로.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저 정성을 다해 나를 살리고 있었을 뿐인데 나를 통해 살아나는 존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내가 전에 알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누가 주는 자이고 누가 받는 자인지를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는 거다. 매사 정확한 것이 미덕이며, 그 정확성을 바탕으로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지혜라고 믿고 있던 나는 조, 아니 솔직히 많이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감사를 해야 할지 받아야 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이 상황은 과연 재앙인걸까? 그 재앙을 피하기 위해 익숙해서 편안했던 낡은 믿음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럴 리가. 그제서야 내게 지금 필요한 선택은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애지중지 품고 있었던 생체계산기를 폐기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한 번이라도 맛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듯이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손실은 바로 그 사랑을 잃는 것임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9년 만에 새삼스럽게 <아기시>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다. 제품 하자로 인한 리콜이라고 봐도 좋다. 내가 그들에게 전한 사랑을 업데이트해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런데 막상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그들은 이미 각자의 현장을 통해 사랑을 스스로 업데이트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그들을 모은 진짜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살리고 있었다는 걸 모르고 댓가 없이 주는역할이 버겁다며 말 아닌 말로 전했을 생색에 대한 사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마음을 아낌없이 나눠준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마음을 다해 사과와 감사를 전해야 할 존재가 <아기시>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새로 시작하는 요가수업도, 유튜브도 또 지금 하고 있고 앞으로 하게 될 모든 활동들은 어쩌면 바로 그 사과와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냐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살리는, 그러니까 사랑하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활동들을 통해 얼마나 충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지, 삶을 꾸려가는데 필요한 돈을 정말로 벌 수는 있을지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돈을 까먹게 될 수도 있고, 사랑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상심도 하고, 힘들다 투덜대기도 하겠지. 하지만 분명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툭 털고 일어나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받은 순간 몸으로 부여받은 존재 고유의 가치를 체험하고, 안내하는 작업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어찌 그리 확신하냐고?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서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함께 누리고 있는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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