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장재용
  • 조회 수 1400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21년 3월 9일 17시 53분 등록


, 나는 지금 너희에게 가지 못한다


 


혈기 넘치던 스무 살 그 해 여름, 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밟으려 짐을 싼 적이 있다. 험난하고 길었던 대간 길에서도 그 곳은 유난히 내 마음을 잡아 끌었는데 험한 지형만큼이나 날씨 또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곳을 지날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았고 한 여름 산중에서 저체온증으로 온 몸을 떨며 서로의 체온을 체크하며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거짓말처럼 맑게 개인 다음 날엔 내리쬐는 햇살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그날 밤, 이름이 아름다운 고개가 평당 천 개의 별을 품고 고생했다며 나지막이 속삭이듯 그 하늘을 보여줬었다. 나는 지금 이화령 고개를 얘기하고 있다


비를 흠뻑 맞으며 걷던 곳은 백두대간 이화령이고 내리쬐던 태양에 힘들었던 곳은 문경새재, 그리고 이름이 아름다운 고개마루는 하늘재다. 천 년을 두고 차례로 개통된 이 세 개의 고개를 3일에 걷는 일은 3천 년 이 땅의 이야기를 밤새 듣는 것일 터, 길은 말을 하지 않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그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안는다. 길은 세월의 지층이 간직한 이야기로 버틴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 바람 한 줄기에 풀어내는 인간의 이야기들을 이 고개의 길은 죄다 품고 있다


충청과 경상의 분수령인 준봉들 사이에서 경상도의 마을과 충청도의 고을을 이어주던 이 세 개의 고갯길은 모두 문경지역에 있다. 2세기 중반, 정확히는 서기 156년에 뚫려 신라와 고려시대의 주 간선도로였던 하늘재는 조선 초, 태종 14년에 문경새재가 개통되기 전까지 영남의 사람과 물자가 한강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늘재를 경계로 고개 아래의 문경 땅의 첫 마을은 관음리이고 재 너머 충주 땅 첫 마을은 미륵리다. 관음에서 미륵으로 가는 고개에 하늘이라, 나도 모르게 손이 무릎으로 가며 외마디 감탄사가 나오는 것이다. 관음과 미륵을 잇는 고개의 이름을 하늘재라 명명한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 그 의젓하고 아찔한 세계를 상상해 보는 일은 길 위의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길을 보는 듯하다. 그로부터 천 년 뒤 문경새재가 뚫렸다. 길은 넓어졌고 고개는 낮아졌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물자들이 교류했다. 다시 천 년이 지난 뒤 이화령이 생겼는데 문경지역의 석탄과 석회석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일제가 길을 놓았다 한다.


모두가 높이의 경쟁을 펼칠 때 고개는 애써 물러선다. 봉우리 사이에서 위를 향한 경쟁을 피하고 새초롬히 앉은 재, , 고개는 수준 높은 여유다. 옛사람들은 산을 올랐으나 꼭대기를 오르진 않았다. 산을 넘는다는 건 고개를 통해 다니는 것, 그들에게 산은 곧 고개였고 수많은 재였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였다. 등정이니 답파니 하는 유아적인 정상놀이는 끝까지 가봐야만 알게 되는 경박한 현대의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말은 가자 울고 임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임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나는 고개가 좋다. 높은 곳에 있지만 다투지 않고 애쓰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그 묵직함이 좋다. 젠 체하는 인간들은 오를 수 없고 허약한 인간에겐 허락하지 않는 삶이 의인화된 형이상학이 좋다. 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고개의 길은 오로지 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의 잡놈들과 장삼이사들이 오가는 길일 테니 분명 온갖 사연과 낮은 욕지거리와 쓸데없는 농들을 다 들어주고 안아주는 품이 넓은 사람일 테다. 바람과 안개와 구름은 또 어떤가, 그것들은 고갯길의 그 웅장한 매력에 푹 빠진 열성 팬처럼 늘 곁에서 불어 대고 흩날릴 것이니 날려서 사라지는 것들이 안식처럼 머무는 마루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큰아이의 이름에 고개를 뜻하는 (), 둘째에겐 들어라는 의미의 ()을 새겨 두었다


높디 높았던 고개들을 머리 위까지 올라가는 큰 배낭을 메고 올랐다. 축적 이만 오천 분의 일 지도를 배낭 허리춤에 끼고 고개들을 보고 또 보고 오르고 또 올랐던 날, 어지러운 등고선 위에 당당하게 제 이름들을 촘촘히 각인하고 하나의 생명 같이 함께 걸었던 나의 고개들. 생명이 충만했던 그 고개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인류를 만들어낸 세상 모든 아내들의 양쪽 젖가슴을 횡단하는 매혹의 생명길 사이에서 봉우리를 봉우리이게 하기 위해 자신을 움푹 파고든 여성과 같이 나의 고개마루들을 사랑하리라. 살아내기 위해 고개를 넘어야 하는 지난하고 헐거운 생들의 어머니를


석남재, 아랫재, 답운치, 추령, 이화령, 조령, 죽령, 구룡령, 미시령 불현듯 나의 고개들이 오늘 떠오른다. 지금은 이 고개들 밑으로 예외 없이 대형 터널이 뚫리고 고개는 잘려 있겠지만 내 두 발로 걸었던 아름다운 이름의 고개들이 내 기억 속엔 여전히 있어 가끔씩 생각을 뚫고 올라올 때 그들을 잊지 않으려 나는 급하게 쓴다.


지금은 없어진 이화령 고개에는 작은 휴게소 하나가 있었는데 묵밥이 기가 막혔었다. 아랫재 샘물과 답운치 첫 계곡물은 이가 시릴 정도로 맑다. 새벽 두 시의 눈 쌓인 미시령, 손가락에 난 피를 소심하게 묻힌 죽령의 섬돌은 잘 있을까. 도로가 쓸고 가기 전 구룡령에서 우리가 쏟아낸 환한 웃음들, 길 잃고 울고 불며 당도했던 석남재 차가운 바람. 


이들이 갑자기 내 기억으로 쫓아와 자신을 드러낸 사태를 보면 분명 지금 아파하거나 내가 보고 싶은 것일 텐데 어쩌나, 나는 지금 너희에게 가지 못한다.




IP *.161.53.174

프로필 이미지
2021.03.11 06:15:52 *.126.41.237

장재용 선생님의 山에서 인생을 공부합니다.

선생님의 글 늘 마음에 새기면서 음미합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21.03.12 10:30:58 *.161.53.174

졸필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가 한참 부족하지만 좋은 글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21.03.12 10:50:00 *.169.176.67

사진 속에 나오는 산, 가고 싶어서 ...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21.03.12 12:00:30 *.161.53.174

매주 엄선하겠습니다.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