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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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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6일 12시 01분 등록

살아있는 맛   

 

 

음식을 사이에 두고 같이 먹는 상대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을 때 삶은 능욕 당한다. 금수들이 그렇게 먹는다. 그것은 맛있지도 않고 맛없지도 않다. 살기 위해 먹는 모든 것은 맛이 존재할 수 없다. 저녁, 그래서 가족들과 둘러 앉아 먹는 저녁은 기뻐야 한다. 그 시간만큼은 큰 아이 맑은 눈을 봐야 하고, 하루 종일 고생한 아내의 표정을 읽어야 하고, 둘째 아이 웃음 뒤에 숨은 힘든 시간을 알아 차려야 한다. 그들을 이해하는 시간, 그들을 읽어내고야 말리라는 내 의도를 음식은 숨겨주고 무마시킨다. 그들을 이해하고 나면 마음이 놓인다. 그 이해가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

 

가령, 새로 들어간 학교에서 놀아주는 친구들이 없어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가 밥을 먹으며 수다를 쏟아 내는 걸 보는 건 목 메이는 일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현지 시장 통에서 기어코 사오고야 말았다는 쌀 2kg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들으면 그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하는 일은 곧 내가 위로해 주고 안아주어야 할 이유일 텐데 나는 늘 ‘먹는 일’ 뒤에 숨어 내 의무를 지우기 바빴다. ‘지금 밥’을 먹고 있어도 ‘내일 밥’을 걱정하기 급급했던 바보. 그런 나를 오히려 그들이 위로했고 나는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맛 난다, 맛 난다를 연발하며 애써 위로를 주고받는 일을 모른 체 하는 것이다. 살던 곳을 버리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낯선 이국땅에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가 들려진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 뒤에 느껴지는 슬픔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이 생활을 위로하는 건 어이없게도 ‘맛’이다

 

먹는 일은 때론 위안이고 때로는 치욕이다. 먹는 일이 치욕이 될 때는 내 위장을 위해 먹을 때다. 먹는 일이 위안이 될 때는 먹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먹는 일을 잊게 하고 먹는 일 너머를 생각하게 하는 때다. 나는 맛에 대해선 일가견이 없고 취향이랄 것도 없는 ‘아무거나주의자’지만 내가 사랑한 라오스의 맛, 두 가지가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맛에 빚진 바가 크다.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내 외로움을 나누었고, 다시 만난 가족들과 저녁마다 즐거움을 선사했고,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곳에 살며 라오스를 사랑하게 했으니 모두가 아련한 맛에 기댄 부채감이다. 그것은 국수와 맥주다

 

기대를 잔뜩 했지만 김빠지는 맛인가. 아마 그럴 테다. 모두가 아는 흔한 맛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들어보라, 우선 국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카오삐약’이라는 이름의 국수다. 카오는 쌀이고, 삐약은 물에 젖은, 그러니까 물에 적셔 먹는 국수라는 말이겠다. 얇고 가느다란 베트남 쌀국수, (Pho)와는 다르다. 카오삐약은 찹쌀로 만든다. 그래서 면발이 굵고 쫀득하고 쫄깃하다. 돼지 뼈를 고아 육수를 만들고 쇠고기를 고명으로 넣어준다. 퍼보다 맛나고 무엇보다 퍼보다 싸다. 카오삐약을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것보다 혼자 먹었던 적이 많다. 혼자 먹는 국수에 약간의 부끄러움을 더하고 이방인의 역외감까지 보태 기어들어가듯 주문했다. 국수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찹쌀의 근기로 인해 쉬 넘어가지 않고 입 안에 머뭇거리던 국수 면발을 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다가 식당 내부도 두리번거렸다가 들었던 국수를 다시 놓기도 하며 먹었다. 육수에 구부러진 면발이 자유파행하며 바다로 흐르는 메콩강을 닮은 것 같다 여기며 먹었다. 푹 고아진 육수 속에서 찹쌀 면발은 스미고 배어서 마지막 한 젓가락은 그 맛이 깊었다. 일부러 국물을 다 마시지 않고 아쉬움을 남겨두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외로움을 잊었다

 

비어라오 beer LAO는 라오스 맥주다. 우리 돈 700원이면 사홉들이 큰 병으로 살 수 있다. 이 맥주는 특이하다. 보리로 만들지 않고 쌀로 만든다. 맥아는 프랑스와 벨기에 산産, 호프는 독일에서 가져와 라오스의 쌀로 빚어 만든다. 그래서인지 맛이 깔끔하고 살짝 감기는 고소함이 매력적인 맥주다. 알코올 농도는 5%, 진하기까지 해서 좋다. 비어라오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시간은 따로 있다. 비어라오는 해질녘 떨어지는 태양의 빛깔을 닮았다. 노을을 퍼뜨리며 붉어진 태양에, 반쯤 부은 비어라오를 들어 올려 갖다 대면 태양이 잔의 나머지 반을 채운다. 그 잔에 든 것이 태양인지 맥주인지를 알기 위해 한 모금 마시면 딱 한 모금의 농도만큼 사위는 붉어진다. 얼마 남지 않은 잔을 털어 넣으면 태양은 쓰윽 하고 사라지는데 맛에 여운이 남듯 태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 자줏빛이 비어라오의 끝 맛이다. 나는 맥주를 사랑해 본 적 없다. 내 사람들을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인격이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맥주라는 걸 품어 본다. 삐아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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