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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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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일 00시 34분 등록

일본 출신의 철학자인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에 관한 연구서이자 안내서인 <단테 ‘신곡’ 강의>를 썼습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저자가 단테와 <신곡>을 연구해온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단테가 쓴 <신곡>을 처음 읽었습니다. 그는 지옥과 연옥과 천국으로 이어지는 단테의 영혼 순례를 담은 <신곡>의 “장대한 구상에 놀라는 동시에 지옥문의 비명에서 희망이 덕목임을 배웠으며,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순수한 동경에 감동 받았다”고 합니다. 단테가 어린 시절 베아트리체를 보자마자 빠졌듯이 도모노부 역시 <신곡>에 빠졌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도 이어졌습니다. 그는 고전어와 이탈리아어를 익혀서 스스로 <신곡>을 번역해보기도 하고, 대학 졸업 논문으로 단테를 염두에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전공인 철학 공부에 집중하라는 지도 교수의 권고를 받고 단테를 졸업 논문으로 쓰겠다는 꿈을 접게 됩니다. 그럼에도 <신곡>에 대한 ‘집착’은 끊이지 않았고, 도모노부는 혼자만의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신곡>에 대한 나의 집착은 가시질 않아 궁리 끝에 매주 토요일 밤 세 시간은 <신곡> 원전을 두세 개 주석서와 함께 읽어 나가기로 마음먹고 노트를 쌓아가는 남모르는 습관을 붙이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전쟁이나 외국 출장 등으로 지키지 못한 적도 있지만, 토요일의 비밀만은 어쨌거나 50년 넘게 이어졌고 노트도 제법 쌓여 갔다. (...) 나는 이 비밀스러운 학문적 습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비밀 연구’는 하나의 ‘습관’이자 ‘학문적 연구’인 동시에 스스로를 성찰하고 바로잡는 수단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그는 토요일 저녁 3시간의 <신곡> 연구를 ‘자계(自戒)’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밀 연구를 시작한 지 50여년 후 도모노부는 우연한 계기로 일본의 한 재단의 요청에 따라 단테와 <신곡>에 관한 15회 강의를 하게 됩니다. 이 강의는 1997년 3월부터 1998년 7월까지 약 18개월 동안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강의를 기반으로 내용을 보강하여 출간한 책이 <단테 ‘신곡’ 강의>입니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나에게 철학의 체계적 사색을 내 방식대로 완성시킨 토요일 밤 공부의 집적”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토요 단테’라는 혼자만의 비밀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이 책은 탄생할 수 없었을 거라는 뜻입니다.

단테와 <신곡>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천복(天福, bliss)’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천복을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주는 구체적인 활동이고, 이 활동은 4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목적적 기쁨’입니다. 천복 활동은 어떤 외적 보상이 아닌 그 활동 자체가 기쁨이고 동기요소입니다. 두 번째는 ‘몰입’입니다. 다른 활동보다 천복 활동을 할 때 보다 깊은 몰입 경험을 할 수 있고, 이 활동은 다른 활동에 비해 착수에 필요한 시동 에너지가 덜 듭니다. 천복의 세 번째 특징은 ‘깨달음’입니다. 천복 활동은 이 활동을 하기 전에 비해 하고 나서 스스로 뭔가 나아졌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그래서 천복을 오랫동안 열심히 추구할수록 세월에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넷째, ‘재능 계발’입니다. 천복은 내 안의 잠재력을 건드리고 이 활동을 통해 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4가지 특성 중에서도 천복의 본질적인 특성은, 첫 번째, 즉 ‘자기 목적적 기쁨’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활동도 천복이 아닙니다. 천복은 말 그대로 하늘이 선사한 더 없는 희열입니다.

단테와 <신곡>이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천복이 아니었다면, 50년 넘게 ‘토요 단테’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토요 단테’에 쏟은 시간을 매주 3시간씩 총 50년으로 단순 계산해봤습니다. ‘매주 3시간 X 52주 X 50년 = 7,800시간’. 7,800시간도 대단합니다만, 이 시간 외에 <신곡>을 연구하고 사색한 시간도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모노부는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책을 쓰거나 강의하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책이나 강의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면 남들에게 비밀로 하기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알렸을 겁니다. 그리고 강의를 하기 위해 5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강의와 책 출간은 오랜 시간 천복에 즐겁게 헌신했던 한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도모노부는 15회 연속강의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누군가 ‘지하운동’과 같은 자신의 비밀 연구를 ‘몰래 정찰하고’ 강의를 하도록 사람들에게 ‘밀고’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보통은 그러한 정찰이나 밀고는 불쾌 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특정할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도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를 생각하면 그다지 멀지 않을 내 죽음과 함께 잊혀 버릴 운명이었던 고독한 단테 <신곡>의 일면이 이렇게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여든을 바라보는 늙은이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큰 기쁨이기도 했다. 그 까닭은 그 동안 15회 강의를 기꺼이 들어주신 분들이 계시기에 이렇게 단테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세간에 조금이나마 공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저자가 수백 년 전의 인물과 그 인물이 쓴 작품에 천작한 과정을 알게 되자, 저자와 책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책의 내용이 좀 더 깊이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의 대표 격으로 불린다는 <신곡>을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면 <신곡>을 탐험하는 내게는, 자신의 천복을 50년간 따른 사람이 쓴 <단테 ‘신곡’ 강의>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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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미치 도모노부 저, 이영미 역, 단테 신곡 강의, 안티쿠스, 2008년
* 홍승완 트위터 : @SW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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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1.08.09 14:20:00 *.85.240.107
올 여름 단내나도록 책에 푹 빠져 지내는 분들이 많아질 듯.................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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