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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27일 01시 08분 등록

지난 주말 남양주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에 다녀왔습니다. 소박하게 꾸며놓은 문화관과 여유당 집터를 둘러보고 나오는데실학박물관이라는 것도 옆에 있더군요. 알찬 박물관을 좋아하는 제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박물관은 여러 실학자들의 소개와 실사구시 정신이 낳은 조선 후기 유산들을 잘 정리해서 전시해 두었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연구와 멋진 결과물들을 보니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사물을 탐구하고 현실적인 학문 추구하며 조선의 지식인들은 깊은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다다르는 길은 같이 연구해 줄 동료나 연구에 대한 지원을 구하기 어려운 외로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정민 선생님의 저서 『미쳐야 미친다』에서는 실학이 널리 퍼지던 18세기 조선에서 지식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무언가에 온전히 어느 하나에 미친 마니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친구랑 놀러 가지도 않고 출세도 관심 없고 오로지 자기가 꽂힌 한 가지만 깊게 파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박물관에서 접하면서 한껏 고양감을 느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규장각의 서리였던 김덕형은 꽃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1년 내내 하루 종일 계절에 따라 꽃이 어떻게 피고 지는지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로도 옮겨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든 책이 <백 화보>라는 책입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손님이 찾아와도 꽃 피는 모습을 놓치게 될까 봐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꽃만 본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친해진 건지는 모르지만) 박제가, 유득공과 친분이 있어 그에 대한 사례가 기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혼개통헌의(Astrolabe)를 만든 실학자 유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천문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아 중국 북경 사행 중에 서양의 천문학 책 번역본을 구해 천문 관측이를 제작했습니다. 천문학을 독학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만들었을 뿐 아니라 관측이를 서울의 위도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게 독학으로 이 정도까지 가능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박물관에서 만난 놀라운 또 한 사람은 문순득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흑산도의 홍어 상인이었는데 배를 타다가 여러 번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등에 표류했다가 근 4년여 만에 돌아온 사람입니다. 마침 그가 귀환했을 때 흑산도에 있던 정약전이 그에 관한 기록표해 시말을 남겨 자세한 내역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놀랐던 부분은 그 책에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 비교표와 자세한 문화적 풍습이 남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문순 득음 나중에 제주도에 표류했던 필리핀 사람들이 언어가 통하지 않아 구류되어 있던 것을 자신의 언어적 재능으로 돌려보내 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외교관계가 거의 없는 국가에 표류하게 되어 생존을 위해 언어를 익히고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는 있었겠습니다만, 관심과 재능, 그리고 어느 정도의 집요함이 없다면 언어를 제대로 익히고 시간이 흘러서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10년 이상 영어를 공부했지만, 공부가 끝나면 거의 잊어버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사회적인 목표를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과 즐거움을 쫓아 깊어졌던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는 저에게 정신적 확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정혜윤 작가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돈과 시선과 관계되지 않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해보는 것 자체가 자율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리워하고 목말라하고 있었던 이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런 내적 자유를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이후에 계속 제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이것인가 봐하는 작은 실마리가 저에게 찾아온 것 같은 즐거운 주말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주말 계획이 고민되신다면 한번 이미침이 닿은 세계를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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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0 01:53:19 *.9.141.108

문제는 관계에 치일 수가 있고 원치 않는 독립군이 되는 수가 있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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