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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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본 적 없다
공기가 희박한 높은 산을 오를 때 내 심장은 이 세상 심장이 아니다. 벌써 수 시간째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은 무게를 잊게 하고, 내 팔이 더는 내 팔이 아니게 한다. 핏기가
빠진 다리는 일찌감치 감각을 잃어버리고 무심하게 걸음을 반복하는 기계 같다. 살아있던 감각들이 느껴지지 않고,
‘나’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죄다 나를 벗어나 버리는 것, 등반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외화自己外化다.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다만 봤다면 거울과 사진, 그리고
영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상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을 맨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지만 거울과 사진으로 보는 나는 나의 모습이 맞다. 거울과 사진은 이 시차(視差, 자신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시선)를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볼 수 없는 것을 본 것 같은 이 강한 시차가 자기외화의 요체다. 그것은 단순한 역지사지의 교훈적 사설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온 완전한 타자他者로 대하는 자세다.
자기외화는 자신을 타자로 대하는 방식이다. 고도의 수행자는 스스로 이 강한 시차로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 자체로 대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삼법인三法印 중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는 이 시선으로
완성되는 것이리라. 이 시선을 가진 자는 편안하다.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빼내 자신을 바라보는 세계는 모두가 자신으로 보인다. 또 모두가 자신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니 나를 잊는
게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무화無化의 세계다.
알면 알수록,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모든 것은 흐리멍덩해지고 답이 없다는 한 가지만 점점 명확해진다. 이젠 포털에 소개되는 자기계발서의 요약이나, 누군가가 삶에 답이 있는 양 말하면 웃고 마는
것이다. 답을 가졌다고 믿는 진리 담지자 같은 오만함만을 경계하라. 철학은 진리를 밝힌다지만, 분명한 건 사는 데 철학은 필요 없다. 철학적 사유가 내 삶을 온전히 덮이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에 답이 없는 만큼 답이라 우기지
말고, 해라, 마라 하며 진리 담지자의 맹목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이 사물 자체인 것과 같이 나 아닌 타자를 존중하며 사는 법 밖에 없다.
십방세계를 둘러봐도 얼어붙은 눈 밭 뿐인 설산에서 심장과 다리와 팔이 나를 빠져 나와 나 아닌 것이
되는 경이로움은 나 스스로 미물이 되는 자기외화의 시선이다. 쌔빠지게 산에 오른 자, 그대는 나 아닌 나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 유일무이한 인간이다. 무아라는 강한 시차를 가진 ‘답 없는’ 인간이다. 혼란한 개소리는 뒤로 하고 이제
정상에 다 올랐으니 용기 내라, 산을 내려가면 고민과 사유는 사라지고 오늘 뭘 먹을까만 남을 것이니 자신감을
가져라, 이 세상 잘난 인간들도 모두 이 고민을 최고로 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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