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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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들 말한다.
그렇지만 누가 알겠는가.
첫 만남 전에 ‘우연’이 우리 사이에서 유희를 벌였음을.
나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첫눈에 반했다.
이전과 달랐다.
그녀는 내게 익숙한 떨림이었다.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번개였다.
찰나에서 나의 운명을 보았다.
우리의 첫 만남 전에도 몇 번의 ‘우연’이 있었던 걸?
첫 눈맞춤에서 떨림과 익숙함을 공존하게 한,
우연한 눈맞춤이 이미 있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어보다 웃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알겠는가.
나와 그녀가, ‘너’와 ‘나’가 아닌 ‘우리’가 될 준비가 될 때까지
‘운명’은 ‘우연’의 모습으로 우리 사이를 오고갔을지.
그런 ‘우연’이 없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제 ‘운명’이 되었는데.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 해도 좋다,
아무도 말해 줄 수 없음에야.
우리 삶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
그녀와 나의 결혼은 ‘우리’의 시작이다.
허나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다음 페이지는 알 수 없으니,
어떤 우연과 운명이 적혀 있든 소용없다.
우리 마음껏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살아가자.
* 오늘 마음편지는, 비스바와 쉼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에서 읽은 시 ‘첫 눈에 반한 사랑’에서 영감을 얻어 그녀와 나, 아니 ‘우리’를 위해 썼습니다. ‘첫 눈에 반한 사랑’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이야.
어쩌면 삼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었다.
* 비스바와 쉼보르스카 저, 최성은 역, 끝과 시작, 문학과 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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