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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0일 23시 52분 등록
질경이를 닮은 사람

입하(立夏)로 날을 잡아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생각만 해도 늘 마음이 짠해지는 부모님과 따뜻한 밥 한끼 나누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제는 호미 질도 힘겨워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 옥수수와 대파, 호박과 피강낭콩 따위를 심었습니다. 즐거운 나절이었습니다.

길 옆에서 놀던 딸 녀석이 이름을 묻는 풀이 있어 바라보니 질경이입니다. 아시는 대로 질경이는 그 모양새가 참 보잘것없는 풀이지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앉은뱅이 키에, 품새 없는 잎사귀. 꽃도 아주 작고 수수하여 눈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풀... 질경이는 다년생 풀로 주로 길의 가장자리나 빈 터 등에서 자랍니다. 수레 바퀴 앞에서 자주 발견된다 하여 한방에서는 잎을 차전(車前), 씨앗을 차전자(車前子)라 부른답니다.

저는 그 못생긴 질경이를 참 좋아하는데, 녀석의 살아가는 방식 때문입니다. 질경이는 주로 옥토보다는 비전박토의 척박한 땅을 골라 자랍니다. 이는 힘겨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에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큰 키의 식물들과 경쟁하면서 번식하기가 힘들자, 녀석은 과감히 불모지를 찾아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퍼뜨리는 진화를 계속한 것이지요.
딱딱한 길에 뿌리를 내리는 것도, 그리고 수시로 밟히고 채이는 여건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질경이는 그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비전박토를 자신의 터전으로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닦고, 마침내 자유의 공간을 일궜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선택하여 자신의 땅을 일군 질경이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숱한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 잎은 바닥에 납작 퍼지도록 진화했고, 또 질기면서도 유연하여 갈라질지언정 꺾이지 않도록 변화했습니다. 번식을 위한 씨앗도 척박함을 견디는 선택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밟혀도 찌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신발이나 바퀴에 묻어 멀리 씨앗을 퍼트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질경이는 그렇게 어려움을 기회로 바꾸며 사는 지혜를 일궈낸 풀입니다.

이따금 질경이를 닮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기꺼워 하고, 타성을 쫓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적 진화를 선택하는 사람. 타인이 내 놓은 길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내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 대가인 외로움과 고난을 삶의 안주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육신은 고달픔을 택할지언정 영혼은 결코 꺾지 않는 사람…

편지가 길었습니다. 문득, 저도 당신도 질경이를 닮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IP *.189.23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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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
2006.05.11 18:26:03 *.199.135.81
용규님 글도 진화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차전(車前)... 기억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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