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장재용
  • 조회 수 978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21년 7월 13일 18시 18분 등록

그 여름, 설악가 雪岳歌

 

 

저 보다 큰 사십 키로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고 상원사 적멸보궁으로 길을 잡은 오대능선. 굵은 빗가락과 함께 마신 라면 면발에 어쩌면 다시 밟지 못할 오대산 비로봉을 향해 힘을 내는 걸음 걸음. 걸을수록 무겁고 무거워 산 아래로 꺼질 것만 같다가도 힘내라 내미는 손을 옳다구나 맞잡으며 너에게 가 닿기 위한 내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듯 어느새 무거운 배낭을 잊고 쏜살같이 멀리 달라빼는 소심함. 찌는 듯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산 한 가운덴 수많은 나무들이 태양을 막아서고. 서늘해진 틈을 타 내리는 비에 이성이고 과학이고 철학이고 문학을 시부리지만 아, 우리는 끝내 항온 동물이었음을 깨닫는데는 불과 삼십 분. 뚝뚝 떨어지는 체온을 서로 확인하며 내 뜨거움 한 사발 너에게 주고, 너의 차가움 한 숟갈 내게 가져와 마침내 견딘 하이포서미아(저체온증).

 

구룡령 옛길을 건너 점봉으로 들어설 때 한반도 원시림 사이를 걷는 신비로움. 끝까지 살고 살아서 이 길 걸었던 우리 이야기를 품고 얽히고 설키고 푸르길. 하루를 그 품에 잤더니 사타구니 작은 혹이 생겨 사십 키로 배낭이 육십 키로로 느껴지던 때 거 진드기다호기로운 선배님의 지나가던 말에 두려움과 원망이 생겨나 욕지거리 퍼붓는 상상을 하던 때 도저히 걸을 수 없어 큰 맘 먹고 배낭을 내리고 살을 파내니 내 피를 먹고 무럭 무럭 자란 진드기. 검붉은 피가 터지며 분노하는 중에 그래도 내 피붙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점봉에 올라서 너를 본다. 아득하지만 손에 잡힐 것 같고 눈 앞에 보이지만 영영 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내 생애 첫 설악, 그때 그 잔상은 사실이어서 마흔 훌쩍 넘은 나이에도 꿈에서 너를 보고 눈물이 도르르 흐른다.

 

한계령을 올라서서 끝청에 이르는 그 가파른 길에 드디어 설악에 들어선 자의 접신인지, 온 몸에 진이 빠져 탈진했던 어린 여인. 내 체온을 확인하던 그 손에 맥이 풀린 모습에 산행이고 뭐고 들쳐 업고 내려가고 싶은 마음. 설악이 살렸지. 그 나무와 풀들이 조그만 기를 보태어 살려냈을 거라. 그제야 돌돌돌 천불동 흐르는 계곡 소리 들리고 죽음의 계곡 한 많은 전설도 귀에 들어온다. 설악골에 진을 치고 설악의 모든 바위들을 내 몸에 새길 때 장군봉 여섯 번째 피치에서 내려다 본 개미 같던 비선대는 내 종아리에 흉터로 남았고, 적벽 크로니길 오버행에서 얻은 세상을 뒤집어보는 담력은 내 전완근이 됐고, 천화대 왕관봉 하강에 자일에 쓸린 상처는 내 허벅지에 새겨졌으니 나는 설악을 몸으로 받았던 것.

 

몸 섞는 일은 오직 사람과만 해야 할 일임을 뒤늦게 알았지만 한 달간의 허니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을 살린 건 설악수퍼 탱크보이. 속초 시내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설악수퍼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코를 박으며 골랐던 배맛 탱크보이. 이 세상 모든 배를 배에 실어 내게 보낸 듯 그 농축된 배의 달달함과 씹으면 아삭거리는 청량함에 한 달간 씻지 못한 내 몸 냄새도 더는 나지않고, 디오게네스와 맞짱 뜰 것만 같은 넝마주의 때묻은 옷가지도, 배낭 무게에 눌린 내 어깨 붉은 두 줄도 잊는 맛이여. 이 세상 가장 값진 500원이여.

 

굽이져 흰띠 두른 능선 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저 멀리 능선 위에 철쭉꽃 필적에, 너와 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 길,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은 설악가 일부, 故이정훈 작사, 작곡)


 

IP *.77.17.123

프로필 이미지
2021.07.21 18:30:53 *.52.45.248

상상하며 공감하며 .... 그리고 감사하며...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315 [내 삶의 단어장] 엄마! 뜨거운 여름날의 수제비 에움길~ 2023.11.13 360
4314 캠핑 가보셨나요? [2] 어니언 2023.06.22 363
4313 [수요편지] 미시적 우연과 거시적 필연 [1] 불씨 2023.11.07 368
4312 [내 삶의 단어장] 발견과 발명에 대한 고찰 [1] 에움길~ 2023.07.31 376
4311 작아도 좋은 것이 있다면 [2] 어니언 2023.11.30 380
4310 [늦은 월요 편지][내 삶의 단어장] 2호선, 그 가득하고도 텅빈 에움길~ 2023.09.19 381
4309 [수요편지] 장미꽃의 의미 [1] 불씨 2023.12.05 382
4308 충실한 일상이 좋은 생각을 부른다 어니언 2023.11.02 383
4307 [수요편지] 살아 있다는 것 불씨 2024.01.03 383
4306 뭐든지는 아니어도 하고 싶은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마음 [2] 어니언 2023.11.23 386
4305 등 뒤로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 [3] 어니언 2023.12.28 387
4304 두 번째라는 것 어니언 2023.08.03 388
4303 [내 삶의 단어장] 오늘도 내일도 제삿날 [2] 에움길~ 2023.06.12 394
4302 새해의 마음가짐 어니언 2024.01.04 405
4301 [수요편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1] 불씨 2023.12.27 406
4300 [수요편지] 실패란 [1] 불씨 2023.06.13 408
4299 [수요편지] 앞만 보고 한걸음 [1] 불씨 2023.11.01 419
4298 [수요편지] 똑똑함과 현명함 [1] 불씨 2023.11.15 420
4297 [수요편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조직문화 불씨 2023.10.11 422
4296 [수요편지] 걱정해서 걱정을 없앨 수 있다면 걱정이 없겠네 [1] 불씨 2024.01.10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