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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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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9일 09시 04분 등록

그들은 극단을 향해 달려 갔다.  기원전 7세기가 저물어 가면서 고대 아테네를 포함하고 있는 아티카 지역의 경제 위기는 심각했다. 한 때 광활한 농지를 가졌던 농민의 자식들조차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형제들에게 분활되어 재분배되는 토지가 점점 작아지게 되자 불안해진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아테네나 중소 도시로 진출해 상인이나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높은 이율로 토지를 저당잡혀 돈을 빌렸지만, 그 돈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로부터 땅을 압류당하고 농노처럼 일해야했다. 소규모 토지는 더 축소되고, 자유 농민의 수는 줄었지만 대지주의 농토는 더 넓어졌다. 해외교역이 늘어나면서 값싼 수입 식품에 의해 곡물의 가격은 떨어졌다. 그러나 다른 물가는 올랐고, 흉년이 들면 농민의 몰락은 가속화 되었으며 굶어 죽는 자 또한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때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수가 모든 토지를 점유하고, 농민은 지대와 부채를 갚지 못해 처자식과 함께 노예로 매매되기 쉬웠다”

 

고대 아티카의 빈농의 문제는 너무도 심각해서 오히려 전쟁이 축복이라 여겨졌다. 이기면 전리품으로 더 많은 농토가 생길 것이고, 가족이 죽으면 먹여 살릴 식구 또한 줄기 때문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부자와 빈자의 재산 불균형이 절정에 이르러 도시는 진정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 사회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제 권력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역사상 이런 위기는 도처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대체로 내란과 유혈혁명 혹은 사회의 후퇴와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 시기에 솔론은 어떠한 무력 조치나 혹독함없이 부자와 빈자를 모두 설득하여 사회적 혼란을 방지했을 뿐 아니라, 이후 아테네의 역사가 더욱 관대한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향한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그는 누구인가 ? 청년시절 솔론은 자신의 삶에 열심이었다. 시를 썼다. 그러나 현실적역량도 탁월하여 교역에 뛰어들어 크게 부를 축적하여 상인으로서 성공했으며, 폭 넓은 경험을 쌓았다. 그의 삶은 자신의 설교만큼 훌륭했다. 그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성실하다는 평을 들었다. 마흔 살 중반에 중산층의 대표가 되어, 내란을 가라앉히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시킬 권력을 부여 받은 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  보수주의가 뼈에 밴 부자들과 상류층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Solon.jpg

 (솔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흉상, 나폴리 미술관)

 

솔론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경제개혁을 수행했다. 바로 유명한 세이사크테이아(Seisachtheia), 즉 ‘무거운 짐 내려놓기’ 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개인에 대해서든 국가에 대해서든 기존의 모든 채무’를 말소시켜 아티카 지역의 모든 저당권을 일소해버렸다. 채무로 인해 노예가 되었던 개인은 해방되었으며, 해외로 팔려갔던 사람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이런 노예화는 금지되었다. 상당한 채권자였던 솔론 자신도 자신의 법에 의해 많은 손실을 보았다. 개인적 손해로 공적 신뢰를 만들어 냈으니 그는 훌륭한 교역자임에 틀림없다.

 

  부자들은 사유재산의 몰수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급진주의자들은 토지 재분배에 대한 조치가 전혀 없다며 실망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지 않아 여론은 만장일치로 이 조치가 피의 정변과 내란에서 아티카를 구했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평생의 권력자로 남아 있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절대권은 매우 매력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거기서 내려 올 길이 없다” 고 거절했다. 그리고 고요히 은퇴했다. 66살의 나이에 22년간의 아르콘 직무에서 해방되어 개인으로 되돌아갔다.   10년 간 그의 법을 개정하지 않고 준수하도록 관리들에게 맹세 시킨 후, 그는 이집트와 동방의 문명을 둘러보러 길을 떠났다 . “나는 늙어가면서도 항상 공부한다” 라는 유명한 말은 그때 한 말일 것이다.

 

그는 메덴 아간(meden agan), 즉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법이 거미줄 같아서 작은 파리는 잡지만 힘이 센 커다란 벌레는 놓친다고 비난하자,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법에 대하여, ‘최상은 아니지만 이것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기꺼이 그를 고대 일곱 현인 중의 하나로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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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19:11:25 *.75.12.25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슬론이란 인물이 사회의 문제를 간파하고 힘들고 어려운 부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 무거운짐 내려놓기" 를 실천하여 처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경제 혁명이 되었군요 남이 하지 못하는 결정을 내리고 실천한 것에 대해 본받을 만하고

그는 그 자리에 내려와서 "나는 늙어 가면서 항상 공부한다"는 말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나라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나와 대기업이든 직장을 다니면 배우는 것에 대해 손을 놓아 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죽을 때 가지  배운다는 모습 존경스럽고 나 자신도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 하는 편이다 배우는 것이 취미가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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