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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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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1일 01시 37분 등록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盡日尋春 不見春)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芒鞋遍踏 隴頭雲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歸來笑然 梅花臭)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春在枝頭 已十分)

 

지은이가 확실치 않은 이 시를 쓴 이는 봄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봄은 이미 집안에 와 있었다고 말합니다. 시에서 ‘봄’을 재능, 꿈, 깨달음, 사랑, 행복, 그게 뭐든 자신이 간절히 찾고 있는 것으로 바꿔보세요. 그러면 소중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가 보입니다. 시를 읽으며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멀리 헤매지 않았다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존 C. H. 우가 쓴 <禪의 황금시대>에 나옵니다. 중국 선종(禪宗)의 뛰어난 선승인 석두(石頭)와 그의 스승인 청원(靑原)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석두가 처음으로 청원을 찾아갔을 때, 청원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석두는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가르치던 조계(曹溪)에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혜능은 중국 선종의 기반을 마련한 위대한 선승입니다. 석두의 대답을 듣고 청원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석두는 “제가 조계에 가기 전부터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청원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계에는 뭐하려고 갔단 말인가?”

 

“조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걸 내가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청원이 석두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청원은 선(禪) 수행하는 이들에게 두 가지 병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당나귀 타고 당나귀 찾으러 다니는 병이오, 또 하나는 당나귀 타고 내려오지 않으려는 병이다.”

 

첫 번째 병은 자신이 그걸 간직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 봄을 못 느끼고 먼 곳에서 찾아 헤맨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석두는 첫 번째 병에 걸렸지만 이 병을 극복했습니다. 조계까지 감으로써 자신이 이미 타고 있던 당나귀의 존재를 확실히 자각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봄을 찾아 나섰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분히 헤매지 않았다면 창 앞 매화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 향기도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설사 매화를 보고 향기를 맡았더라도 그 속에서 봄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래 멀리 방황하는 과정을 거쳐 감각이 예민해졌기에 익숙한 것(‘창 앞 매화와 향기’)에서 낯선 것(‘봄’)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겁니다. ‘오래 멀리 헤맨 것’은 일종의 훈련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없었다면 멋진 통찰은 담은 아름다운 시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청원이 말한 두 번째 병은 자신이 가진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봄을 찾아 집 나가서 헤매다 돌아와 창 앞 매화향기에서 봄을 본 것까지는 좋은데, 그 향기에 집착해서 매화를 꺾는 병입니다. 꺾인 매화는 이내 죽고 향기도 사라집니다. 석두는 두 번째 병에 빠지지 않았거나 이것 역시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청원은 자신의 후계자로 석두를 꼽고, 법통(法統)을 석두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병에 빠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 청원은 “아예 (당나귀를) 탈 생각을 버려라. 네 자신이 그 당나귀요, 이 세상 모두가 그 당나귀다. 그것을 탈 방법은 없다. 아예 타지 않는다면 온 우주가 네 놀이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고수의 통찰입니다. 봄은 먼 곳에도 가까운 곳에도 없습니다. 깨달음은 먼 곳의 스승이나 주변의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봄도 깨달음도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봄이고, 내가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걸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오래 멀리 헤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역설(逆說, paradox)입니다.

 

역설을 품는 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역설을 품을 수 있을 때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롭기 어렵고, 현자도 드뭅니다. <禪의 황금시대>에는 역설적인 지혜와 위대한 선사(禪師)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모순(矛盾)으로 가득하고, 모순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게 삶인 것 같습니다. 모순을 꿰뚫고 초월한 것이 역설이니, 역설의 고수인 선사들과 그들의 역설적 지혜를 들어보는 건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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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C. H 우 저, 김연수 역, 선의 황금시대 역, 한문화,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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