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어니언
  • 조회 수 45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3년 4월 13일 13시 39분 등록

오늘은 아빠의 기일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날이 되면 아직 바람이 차던 장례식장과 온기가 남아있던 유골함 같은 것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사월이 시작되고 맞이했던 두 번의 주말 동안 저는 제 개인적인 추억이 많은 사람들과의 집단 기억으로 확장되고, 시간을 뛰어넘어 예전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다가오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하여 추억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지금에 속한 것이 되어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 사월의 첫날은 토요일이었지요. 유달리 맑고 따뜻했던 그날, 화사한 벚꽃과 함께 아빠의 소천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장은 오래 알고 지내던 아빠의 제자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로도 가득 찼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큰 전환점에 구본형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나누어주셨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추억이 씨실과 날실처럼 모여 아주 아름답고 커다란 하나의 무늬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준비한 행사는 아름다웠고, 의미 있었으며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빠에 대해, 작가 구본형에 대해, 그리고 그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을 생각할 때 있었던 빈칸들이 따뜻함으로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제가 아빠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이 마음을 함께 지녔던 사람들의 온기가 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저녁에 있을 제사를 준비하며 엄마와 통화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추모 행사가 있고 며칠 동안 계속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엄마도, 저도 구본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체와 실제로 만났던 날이었기 때문이어서, 굉장히 인상적인 시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마음속 어딘가에는 돌아가신지 10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만 소중한 사람일 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에 대한 반증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제가 경험하고 느꼈던 아빠의 삶이 진짜였다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행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주말에는 인왕산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화재가 있어서 좀 걱정했는데 불탄 곳이 인왕산 등산 코스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꽃과 푸릇한 나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 직장에서 처음 사귄 회사 친구와 성곽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익숙한 거리들이 보였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라일락, 부암동의 좁고 경사진 거리,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과 바위들이 이어진 능선, 오래된 궁궐과 성벽, 차갑고 상쾌한 공기 같은 것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저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봐,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사라지지.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도 있어. 그리고 네가 이곳에 있었던 추억은 아주 아름답지.’


멀리서 우리 집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오래된 추억들을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물건이 꽉 찬 서랍을 열었을 때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추억은 한꺼번에 저를 집어삼켰습니다. 집에서 보냈던 시간들, 가족들과 함께 발코니에서 마셨던 시원한 맥주, 함께 빨래를 널던 기억, 키우던 강아지들의 보드랍고 따뜻한 털, 봄볕과 기분 좋은 바람, 살랑이던 꽃, 이파리들, 늘 흥미로운 책이 가득했던 아빠의 서재, 청결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던 엄마의 부엌.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십 년 넘게 지낼 수 있었던 행운.

저는 제가 기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잘 믿지 못한다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여리고 민감한 저는 분명히 느껴지는 뭔가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고, 그렇다고 제가 느끼는 감정을 말이나 글로 풀어내기 어려워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추억처럼 주관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렇습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흔적은 다 없어졌지만, 제가 살았던 동네에 있는 산은 아마 제가 할머니가 되어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이 있는 한, 저 스스로가 믿지 못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제가 이곳에 살았던 것이 진짜였으며, 그곳에서 행복했고, 그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이 장소가 나를 키웠고,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의 내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정하고 든든했던 가족을 기억하며 자신을 믿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추모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한 사람의 삶 속 불꽃을 다른 사람의 삶에 옮겨 붙이는 것’이라는 뜻을 조금 더 추가하여 이 단어를 확장하려 합니다. 구본형 선생님이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는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을 차가운 물속에 처박아 넣거나 가슴에 불을 싸지르는’ 글을 썼고, 자신의 말과 글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아빠의 삶을 깊게 복기하면서 저는 조금 느슨해졌던 퇴근 후 글쓰기와 독서를 다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작은 희열을 주는 불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촛불만큼 작더라도 마음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월에 피운 불꽃을 잘 간직하여 남은 한 해를 하루하루 잘 보내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매일도 그러길 바랍니다.

IP *.143.230.4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