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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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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0일 19시 47분 등록

[월요편지-책과 함께] 인간에 대한 환멸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1.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 비망록 중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가볍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무거워서, 힘겨워서라는 말이, 결국은 미치도록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구나와 같은 말임을 깨닫는다. 타인의 스물넷 비망록은 꽁꽁 싸매어 지고 있는 무게를 어쩌지 못하는 자에게 조곤조곤 채찍질하는 말이었구나. 개인 블로그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였다.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글이 마지막이었고, 그건 내가 새로운 직장을 옮긴 시기와도 겹친다. 그러니까, 문득 나는 내가 이렇게 돼 버릴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나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잠식되어가는 대표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이 책처럼 한없이 소모되고 잠식되어 갈 것임을 알았을지도.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는 때다. 안팎으로 밀어닥치는 뉴스에서도 사람들의 대화에도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 속에서도 결국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이기에. 나는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 소리를 덮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했기에 복잡한 무게를 지고서 그냥 그렇게 있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어떤 사건들을 목도하게 되면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나면 스멀스멀 피어나는 환멸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은 하나다. 바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성을 떠나 책을 읽은 순간의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감정은 바틀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였다. 어쩌면 ‘바틀비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틀비가 아니니  바틀비를 대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성실함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가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다. 바틀비에 대한, 바틀비가 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 말이다.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이다. 화자인 ‘나’는 “야망없는 변호사 축에 속하며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하며” 신뢰있는 인물의 평을 빌려 자신을 “신중함과 체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바틀비는 어떤 사람인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온통 하얀 건물만이 가득한 월 스트리트 또한 필사하는 바틀비-묵묵하고 창백하고 기계적인-처럼 보인다. 바틀비 역시 동화되어 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틀비는 출근 사흘째에 필경사가 행하는 필사 검증업무를 거부한다. 필경사는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며 서로 검증을 돕기도 하는데 이 업무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나’의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필사 검증을 거부하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요구에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할 뿐이다. 바틀비는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하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무단 점거·기거하며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바틀비에게 ‘나’는 기묘함과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결국은 ‘니’가 자신의 사무실-바틀비가 기거하는, 바틀비는 두고-을 옮겨 이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바틀비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 표현했고 그래서인지 ‘저항’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가 많다. 그러면 바틀비는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그건 ‘저항’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었다. ‘저항’이라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 외침의 그 어정쩡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함. 의지와 의미를 품고서 하는 말인지 모를 태도에 마침내 택한 ‘아무것도’라는 것은 선택인가. 바틀비는 무언가를 선택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고용주의 필사 검증은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이자 “계약”에 의한 요구다. 필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필사 업무 종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나도 마찬가지로- 바틀비에게 왜 그러느냐 묻게 된다. 왜? 그에 대한 답없이 바틀비는 필사만을 할 뿐이면서 기거할 명분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구치소로 연행된다. 구치소에 연행되어 갈 때 바틀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생기도 없고 동요도 없는 그 특유의 태도로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고 한다.

  저항은 전투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의미를 품고서 행하지 않은 것은 저항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전투적으로 나서 주는 사람을 원하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바틀비의 행동이 ‘저항’이려면 바틀비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동료가 벌이는 크고 작은 투쟁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의 일이 나의 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해와 지지가 형성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땅히 원하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 또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바틀비는 저항의 인물이기보다는 패배한 인간으로 보였다. 삭막한 자본주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일만하다 병든 모습, 생각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고 피폐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틀비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역시 1800년대의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월가나 지금이나 사회시스템은 그대로인 채 사람만이 병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겐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그러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멸해가고 싶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틀비의 “선택하지 않음”에 더 집중하며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했건만 바틀비의 경우로 사례가 달라지자 생각했던 것이 흐릿해졌다. “계약”과 “규율”에 따른 행동질서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 속에 그 계약의 성립이 공정했는가를 잊어먹었다. 더 나아가 저항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시하기까지 된다.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바틀비의 외침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이야기했다면 바틀비의 편에서 지지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도 심적으로도 온전한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개개인은 보다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목도하게 되면서 나는 바틀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직장이란 일반적인 인간이 가장 오래 머무르고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세계다. 하나의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소소한 행복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조직 속에 있는지 아닌지, 결국 인간들의 마주함이니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그 욕망이 어떻게 조절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그렇게 휩쓸리기도 하겠고 휩쓸려고도 하겠지만, 인간의 자정작용이란 것을 믿어도 보지만 겪어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제 욕망을 보다 우위에 두는 목소리가 더 크게 나타나면, 그 목소리가 겹치어진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란 너무나 뻔하다. 사람들은 제법 제 욕망의 얼굴을, 이기적인 욕망의 얼굴을 잘 감추어 포장하며 타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형태로 표출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라면 바틀비는, 충분히 숨쉴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굳어진 집단 속에서 그나마 저런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도.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바틀비를 억압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게 익숙했던 그리고 성취하고팠던 다양한 가치들이 상충한다. 이해의 순간과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떠오른다. 다른 말은 없이 저 말만 남은 바틀비의 외침을 반복되이 떠올리며 인간에 대한 환멸에 푸욱 절여진 내게는 스러져가는 한 인간의 모습만이 남는다. 안타깝게도 어떤 집단 속의 바틀비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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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4 15:35:37 *.169.54.201

글을 읽으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규칙과 질서는 효율과 효과성을 위한 것이지 계약과 규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과 전술은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서 수단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선택의 여지 없는 법칙은 아니다. 

곧 한계가 아니라 임계다.  주어진  상황과 조건속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표달성을 위한 범주내의 개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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