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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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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8일 09시 41분 등록

[내 삶의 단어장] 뒷모습을 보여라!

 

  그 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세상 모든 검은 크레파스를 동원해 시커멓게, 더 시커멓게 덧칠해 놓은 것만 같았던 밤을 기억한다. 기억은, 등을 보이며 끝없이 걷기만 할 것 같은 엄마의 모습과 그 뒤를 종종종 뒤따라가던 내 모습에서 시작한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엄마는 내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고갯짓도 없이 계속 걸었다. 낯선 길이라 어디로 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동생을 업느라 손을 뒤로 한 엄마가 꽉 쥐고 있던 지갑의 흔들림이 마치 잘 따라오라는 엄마의 손짓인 것만 같아 어떡하든 바짝바짝 지갑을 뒤따랐다. 내가 엄마 등에 업혀 있었대도 놀랍지 않을 만큼 아직 학교도 가지 못한, 난 한 자릿수 애였고 세상 가장 큰 무서움이란 엄마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숨은 제대로 쉬었는지도 모르겠다. 절대로 넘어져서도 안 되고, 울어서도 안 되고 지갑을 놓쳐서도 안 되는 가쁜 걸음……. 가도 가도 어둠 속으로만 깊이 들어가는 엄마를 붙잡을 수도, 소리쳐 부르지도 못한 내 볼만 그 시커먼 그림 속에서 빨갛게 타올랐을 게다. 잠에 취한 동생의 숨소리, 엄마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붙어 있어 자신만만하게 내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발보다 귀가 먼저 달려가기도 했던 그 밤. 엄마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엄마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시커먼 그림 속에서 검은 사람 형상이 두드러지게 튀어 나와 달려 나갔다. 엄마가 검은 형상을 뒤쫓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지갑이 흔들리지 않았다. 검은 형상은 엄마와 나 사이에 있던 지갑을 낚아채 사라졌다. 골목 사이로 달려가는 검은 형상은 왼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그렇게 삐딱한 모습으로도 재빠르게 뛰어갔다. 놀란 엄마의 얼굴에, 줄곧 엄마의 지갑을 보며 뒤따랐던 내가 지갑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어렴풋이 들었지만 그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기에 아주 안도했고 삐딱하게 달려 나가는 검은 형상에게 한편으론 고마웠다.

  그 때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나 회식이란 명패를 걸고 알콜 흡입 후 집으로 가던 길, 길가엔 아무도 없었고 저 멀리 붉은 가로등이 보이는 지점에서였다.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 ‘저기요

  본능적으로 그 소리를 외면한 나의 걸음이 멈추지 않자 소리 주인은 내 앞으로 달려 와 섰다. 마침 그 자리, 가로등이 내리비쳤음에도 모자도 옷도 얼굴도 온통 검은색이었던 소리의 주인에게서 빛난 건 단 하나였다.

극도의 공포와 맞닥뜨리면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미처 몰랐는데 난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명부터 터져 나왔고 숨 가쁘게 뛰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틈으로 도망가는, 골목 사이로 삐딱하게 기울어 달려 나가는 그 뒷모습. 나는 또다시 그 뒷모습에 안도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지 자다가 꿈을 꿨던 것인지 내가 그 일을 겪었는지를 잊고 산지 오래인데, 생각해보니 그냥 세월이 오래 지났구나 싶다. 뭐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안도하는 것이야 당연했다지만 어쩌면 그러한 초보 도둑과 강도를 만난 것에 감사하기까지 했던.

  연이은 뉴스는 각각 20년 간격이 아니라 며칠 사이로 벌어지는 일을 전한다. 그 속에 내가 없었기에 그저 화면으로 보고 있기에, 나는 그 검은 형상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화면 속 그들은 삐딱하게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혀 삐딱하지 않은 걸음걸이,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

  잘못된 행동을 알기에 어둠 밤길에 나타나 죽어라고 도망치는 게 도둑이며 강도라는 것을, 나쁜 놈은 죽어라고 도망가는 게 당연한 그림이라고 적혀 있던 것을 지워야 하나. 2023, 일찌감치 어지럽고 무질서한 세계에 나타나 누군가 지시라도 내린 것마냥 일사분란하게 난동하는 범죄자들에게 뒷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둔 밤길이 아닌 낮에 등장하여 지갑을 낚아채고, 칼을 들이대는 무수한 세력들을 보며 그럼에도 안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무너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무너진 정신은 무너진 질서와 맞물려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어느 누가 부끄러움과 잘못됨을 알아 뒷모습을 보여 줄 건가. 국가가 있는데 국민의 삶이 각자도생이라니. 잘못한 자가 죽어라고 뛰어 도망가는 모습이 보고 싶다. 정면을 향해 걸어 나오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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