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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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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1일 13시 44분 등록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번 주 편지는 지난주에 이어 ‘시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계속 쓰겠습니다.

시부모님이 올라오시고 첫 주말을 맞았습니다. 온 가족이 경기도 외곽으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양주 시에 있는 장흥 아트파크로 향했습니다. 전시관람은 저의 오랜 취미이기도 했고, 바람 쐬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의 요구에 들어맞았으며, 화가이자 고등학교 미술 교사셨던 아버님의 취향에도 잘 맞겠다 싶었습니다. 실내 그물 놀이터와 넓은 마당이 있어서 어린 두 아이가 뛰어 놀기에도 더 없이 좋아 보였습니다.

“난 운전할 때 정말 좋아!”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어머니 모습은 언제나 참 멋져 보였습니다.

“얘들아, 할머니 운전하니까 멋지지? 너희들도 좀 더 크면 자전거도 타고, 행글라이더도 타고, 번지점프도 해라. 할머니는 그런 거 못 해 본 게 후회된다.”

아트파크에 도착하여 아버님과 남편은 전시실로 향했고 두 아이는 놀이터로 향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전시관람을 마치고서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 왜 못 해 보셨어요?”

운전을 즐기고 잘 하는 분인데, 행글라이더나 번지점프라면 몰라도 자전거는 왜 못 탔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명절과 제사 때 온 가족 여성들을 대표해 부엌을 통솔하는 어머니 모습은 장군 못지않았고, 장을 볼 때 시장 사람들을 대하거나 물건을 고를 때도 어머니는 유명 정치인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위풍당당한 어머니 모습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걸 못 해 본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글쎄, 내가 지금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달랐을까?”

어머니 말씀은 이랬습니다. 3남 1녀로 태어나 어머니의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남자 형제들은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답니다. 십대 초반에 어머니는 남자 형제들이 자전거 타는 게 부러워서 한번만 타 보겠다고 했지만 오빠가 “넌 여자잖아! 처녀막이 손상되면 어떡해? 안 돼!”라면서 못 타게 했답니다. 오빠와 남동생들의 반대로 자전거를 타보지 못했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어 운전을 배웠고 운전할 때 굉장히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십대 후반에 외출이 너무 하고 싶었던 어머니는 달 밝은 밤에 식구들 몰래 친한 친구 몇 명이서 밤마실을 감행했습니다. 달이 밝아서 대낮 같았고 기분이 좋아진 여자 친구들은 들판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도 질렀답니다.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동네 청년들이 무리지어 쫓아오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서 걸음아 날 살려라 집으로 도망쳐 왔답니다. 그날 밤 이후로 젊은 시절 어머니는 혼자서 외출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외출을 해 보지 않아서 지금도 나들이를 할 때면 마음이 설레고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어머니에 감정이입이 되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장군이나 정치인이 된 어머니를 상상하며 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제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찜질방을 전전하며 고시원을 구했던 이야기며 미국에서 유학할 때 교내 식당에서 일하고 야간에 학교 건물 청소를 하는 걸로 부족해 일을 더 구하기 위해 시내 상점을 돌며 연락처를 남겼고 결국 일자리를 찾았던 이야기. 중국어를 못 하지만 중국 출장을 갔고 중국에서 택시를 타고서 의사소통이 안 돼 엉뚱한 지역으로 갔지만 손짓발짓을 다 동원해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무사히 돌아온 이야기와 어머니께 두 아이를 맡기고 미국 뉴저지 장기 출장을 갔을 때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느라 고속버스를 타고 뉴욕 맨해튼에 가서 하루 종일 걸어 골목골목 안 가본 곳이 없으며 미술관이란 미술관은 다 둘러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부터 전시관람이 취미가 되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전시관람을 하고나면 괜찮아진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와서 좋고 다음에는 뉴욕 맨해튼의 미술관에도 꼭 함께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난 항상 네가 부러웠다. 넌 용기 있는 아이잖니?”

그날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강해보이고 싶어서 늘 인상을 쓰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지만 사실은 마음 여리고 꿈 많은 소녀 같은 어머니를, 내면 가부장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해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용기내지 못하고 평생 집안에서만 계셨지만 아직 살아있는 어머니의 동경을 마주했습니다. 주말 나들이로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와 오랜만에 전시관람으로 충전이 된 저는 서로에게 속마음을 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저는 잊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린이날 손녀에게 ‘파란색 네 발 자전거’를 선물하던 어머니의 서툴지만 진심어린 마음을 말입니다.

“아들 낳을 때까지 아이 낳아서 대를 이어라”와 “넌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아이야”

시어머니께서 저에게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드는 이중메시지를 주시더라도, 메시지를 선택하고 처리할 자유는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거실 한 쪽에 두었던 상자 속 ‘임부복’을 한 벌 한 벌 의류수거함에 집어넣으며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그래! 난 용기 있는 사람이야!”

파란색 네 발 자전거에서 보조 바퀴를 떼어내고 씽씽 신나게 달리는 큰아이를 보면서 상상했습니다. 언젠가 가부장제 노동에서 해방되어 ‘나’의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 모습을 말입니다. 더불어 내 삶을 잘 살아가고 있을 미래의 ‘나’를 말입니다. 

다음 주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에서 ‘시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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