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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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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7일 18시 06분 등록

다 살 것

 

백신을 맞고 마치 코로나가 내 몸을 할퀴고 지나간 듯 지옥에 다녀왔더랬다. 늘 달고 살던 감기를 올해는 지나가나 싶었는데 여지없이 마주하는 고열과 근육통에 당최 손 쓸 수 없는 속수무책의 이틀 밤을 보냈다. 첫날 밤, 체온은 39도를 쉽게 넘기고 나는 하데스를 친견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지금 죽어도 좋은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나는 답했다. 그는 해야 할 일에 관해 묻지 않았고 나를 조용히 놓아 주었다.

 

이튿날 밤, 타이레놀조차 듣지 않을 무렵 다시 오기를 알고있었다는 듯 그는, 자네 왔는가 하는 표정으로 명령했다. 지금 죽을 수 없다면 그대에게 남아있다는 그 일에 관해 말하라.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 남아있다는 일이라는 게 뭘까, 뭐였지, 뭐였더라. 표정을 고쳐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죽지 않고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죽어도 좋은가, … 답을 하라, … 지옥에서,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았다. 일상은 다시 시작됐고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노트북 전원을 켰다. 재택근무 모드를 유지하며 12시면 점심을 먹었고 저녁엔 산책을 했고 가끔 달리기도 하며 심장이 살아있는지도 확인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온 몸에 흙을 묻히고 밤이 되어 기진해서 집에 들어왔고 고양이 끼끼는 소파에 손톱을 긁어댔다. 집 앞에 꽃들은 노랗게 피어 있고 이파리는 푸르다. 멀리 보이는 호수는 오늘도 잔잔했고 호수를 감싸는 숲은 살랑거렸다. , 나는 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할 수 없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나와 무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개인을 같은 가족으로서,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국민, 같은 인류로서만 승인해왔다. 요컨대 고차적인 존재를 통해서만 개인을 인정해 왔던 것이지, 개인을 단지 개인으로서 인정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가족, 공동체, 민족, 국가, 사회와 같은 유적 존재가 강요하는 도덕이 아니라 그것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 실제로 눈앞에 있는 타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그와 같은 시선이 각자에게 필요한 것.

 

내 할 일에 관해 말을 못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나와 아무런 연관도 영향도 없는 무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곤란하고 당황스러워 얼버무린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말한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사회적 관계, 요컨대 생산관계만이 아니라 젠더, 가족, 에스닉, 민족, 국가, 그 밖의 관계 차원에 놓여있다. 더욱이 그것들은 때때로 상호 모순된다. 나의 본질은 그러한 관계들에 의해 규정된다. 나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상상적 관념은 그와 같은 관계들을 소거해 버린다. 한편, 동시에 나는 그러한 관계들에 의해 규정된 본질과는 다른 실존이다. 나의 실존은 아무런 내용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이다.' 슈티르너는 그리하여 '나는 나의 사항을 무無위에 놓았다.' 고 말했고, 아놀드 누게는 반대로 '일체를 역사 위에 둔다' 고 했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서 놓여나, 무관성 위에 나를 놓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사실, 다 사는 것 외엔 없는 것이다.


 

IP *.250.1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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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9 18:09:20 *.169.227.25

조금은 이름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데  가서 

'왜 사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한 참을 생각하다가 답하기를 

'죽지 못해 삽니다.' 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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