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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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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7일 12시 05분 등록
10막 10장 ③ 이젠 법인으로

매출의 가장 극적인 전환은 월 1억을 달성하고 나서였다. 1억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야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자금상황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당장 갚아야 할 부채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나 직원들의 자신감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급식사업을 시작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한 달에 천만원이라도 팔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그 단계를 넘어서니 1억을 팔면 지금의 어려운 문제는 다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죽어라고 여기까지 오니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조금만 더! 를 외치게 되고 끝없는 성장의 톱니바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욕심이 많은 자는 욕심으로 망한다고 했던가. 성장이 성장을 불러오는 선순환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전편에서 나는 영업에 강하다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영업은 나의 전공이었을 만큼 잘했다. 학교급식 입찰에서 2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시설급식 영업에서도 대기업과의 경쟁 입찰에서도 5번 붙어 한번은 우리가 이겼을 정도였다. 고작 20%의 성과라 우스운가? 당시 급식대기업은 삼성 에버랜드, LG, CJ 푸드시스템, 풀무원, 동원 등 쟁쟁한 상대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금력과 영업망, 그리고 대기업의 협력사 운운하는 하청시스템을 동원한 상층단위 영업력은 월 매출 1억을 갓 넘은 꼬마 급식회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정도 될래나? 먹고 살아야 하기에, 나만 바라보고 사는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밤을 낮삼아(?) 열심히 일해야 했고 덕분에 조금씩 회사는 성장해 갔다.

99년 여름 법인 설립을 하였다. 개인사업자로 더 이상 경쟁을 이길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도 조그마한 밥 공장 한편에서 25평이나 되는 곳으로 옮겼다. 이제 나도 멀티사업자가 되었다. 법인의 대표이사, 개인사업자의 대표를 겸하게 되었다. 법인은 시설급식, 개인사업자는 배달급식을 전담하는 시스템으로 아주 이상적인 형태였다. 같이 시작했던 후배는 법인의 이사로 기획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 당시 나에게는 몇 명의 후배들이 나를 도와서 일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운동을 하던 선후배였지만 사회에서는 사장과 직원으로 엄연하게 구분되었다. 상하의 구분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잘 극복해 나갔다. 첫 번째 후배는 지금 마실을 같이 운영하는 진성범이라고 하는 친구이다. 학생운동 시절 만난 아내의 학교선배이기도 한 이 친구는 탁월한 기획력과 묵직함으로 급식사업의 오른팔 역할을 잘해 주었다. 장산곶 창업멤버이기도 하였고 나와 지분을 반반 소유한 창업동지였다. 2000년 다산정보통신이란 회사를 만들어 독립하기도 하였다. 또 한 친구는 학교 2년 후배로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고 있는 김진선이란 친구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한결같이 나를 도와 지금까지 오고 있다. 나는 그에게 센터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 한 친구는 아직도 시설급식분야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임승세라고 하는 친구이다. 체육학과 출신 답지않게 영업에 한 재주가 있는 친구다. 마지막으로 우리 꿈 벗 총동문회 회장으로 계신 허영도 사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황찬익이라는 친구가 있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성실 그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린 아주 멋진 친구이다. 이렇게 많은 후배들이 내 곁에서 나를 도와 일했다.

법인 설립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급식전문가를 한 명 채용하였다. 서울에 있는 급식전문회사에서 영업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알콩 달콩 ‘사장패밀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후배들하고만 회사를 운영하던 흐름에 일대 변화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것도 이사급으로 영입했으니 다른 후배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감성과 열정으로 하던 경영에 숫자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모든 계획서와 보고서에는 숫자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다. 영업을 위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이전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회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 같았다. 많이 배웠다. 그는 급식비즈니스만 15년을 한 베테랑이었고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아온 풋내기들 같았다. 결국 2년 후 안타까운 결별을 하였지만 기업운영의 새로운 시스템을 경험해 보았다. 그리고 이 경험은 지금 새로운 기회로 나서고 있다.

법인 전환과 전문가의 영입으로 회사는 급성장을 하였다. 매출 1억을 달성한지 3년만에 500%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어느 거래처 담당자는 기껏 운 좋은 2세 경영자로 볼 정도로 나는 젊었고 패기만만하였다. 본사도 100평짜리 좋은 곳으로 이전하였다. 사장실도 만들고 회의실도 만들었다. 직원들도 자꾸만 늘어 본사 관리직만 영양사들을 포함하여 30여명에 이르렀다. 나도 거의 15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거느리게(?) 된 어엿한 중소기업의 오너가 된 것이다. 골프도 배웠다. 접대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워야 한다는 핑계로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자잘한 업무들을 보고하는 아래 직원들이 보기 싫어졌다. 아, 그런 일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바쁜 사장한테 해결해 달라고 하면 니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똑바로 좀 해. 신경 좀 쓰게 하지 말고 말이야. 그 당시 내가 했던 말들이다. 지역의 유수한 기업인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였다. 영업을 핑계로 만났지만 내심 나도 그런 자리에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폼 나게 살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장의 할 일 인줄만 알았다.

아마 어떤 변화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런 생활을 주된 경영활동으로 삼고 있는 기업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있다. 나의 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내부로부터 왔다. 접대란 누구를 막론하고 받는 이보다 대접하는 이가 약자가 되는 자리이다. 나의 업은 특성상 거의 ‘을’의 위치에서 지내야 한다. 거래처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최고경영자까지 모두가 크던 작던 ‘갑’의 위세를 부리려 하면 꼼짝없이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대등한 거래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수세적인 위치에서 살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당하지 않았어도 될 일들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였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체급식이란 업에 대한 자긍심이 없었던 것과 내가 그 업의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던 것 같았다. 남들처럼 폼 나는 일, 반도체, IT 등 벤처기업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나는 그들에게 한없이 허리를 굽혔고 그럴 때마다 그 자리를 탈출하고 싶었다.

술과 골프, 비싼 모임 등으로도 채워지지 못한 어떤 마음의 상처는 결국 이 업을 떠나게 만들었다. 극복해내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아직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술과 사람에 치여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잘 극복해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 당시 최선의 선택을 하였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 이런 선택의 기회가 온다면 조금 더 세련되고 꼼꼼한 앞뒤 분석 후 결정하겠다는 생각이 더해질 뿐이다.

이 비즈니스는 나의 30대 절정의 기간이었다.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매출 100억의 가능성을 가지게 해 주었고 자기만의 제국을 꿈꾸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랑 가장 맞는 사업아이템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딱 3년 정도 미친 듯이 일했고 일을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고 주변에서 말할 정도였다. 가정과 일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고 실제 아내랑 몇 번이고 파국의 그늘까지 생각할 정도로 큰 부부싸움도 있었다. 도와주는 후배들이 각자 자기 학교에서는 제일 부지런한 친구들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성실하고 열정적인 후배들을 데리고 있었던 덕분에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중간에 합류했던 급식 전문가, 젊은 영양사들은 내 삶의 한 영역을 차지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30대 가장 열정적인 삶이 가능했다.

결국 급식법인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운영하다가 작년 지분을 넘겨주고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적당한 타협이라고 할까? 아마 그 방법이 최선의 결과일거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비즈니스였고 또한 나의 한계를 절감할 수 있었던 비즈니스였다.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전문가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준 시간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이들이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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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거인
2006.05.06 06:00:34 *.103.178.156
진화는 끝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좋은 경험은 훌륭한 선생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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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5.06 23:38:17 *.44.152.193
허 허, 자로...점점 10막 10장이 나를 돌아보게 하는구만. 어버이 날을 댕겨서 어제는 본가에 가서 어울려 놀고 오늘은 처가에 가서 다 모여 노래방에 가서 재롱 좀 떨다 왔네...진정으로 버리고 싶은데 삶에 대한 열망들이 아직은 너무 많아 이렇게 살고 있지...그런데 자로, 자네 정말 대단하네. 며칠 전에 사무실의 서른 일곱된 늘 웃고 다니는 친구가 그러더구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친구, 얼굴로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더구만...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게 인생이야'라고...그런데 자로,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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