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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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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3일 16시 23분 등록

이대 여성병원 환우회에 글쓰기강좌를 나가고 있다.  암수술을 받고 후속치료를 받고 있는 5,60대 아주머니들이 오시는데, 나는 그 분들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딱히 적당한 호칭이 없고 내가 전에 학원을 오래 해서 익숙한데다가 친근하게 들려서 좋다. 초반에는 좀 어리둥절했었다. 딱히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라기 보다 소일삼아 나오시는 것 같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가 나이듦과 발병에 관심이 많은 연배라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끌어왔는데, 어제 이 분들과 글쓰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4행일기’나 ‘오문오감변화일기’, 편지, ‘말하듯이 글쓰기’ 같은 간단한 글쓰기를 해보거나, 연로하신 분들이 쓴 글을 소개하던 차라 어제는 시바타 도요의 시를 같이 읽었다. 시바타 도요, 99세인 작년에 시집 ‘약해지지 마’를 펴내 화제가 된 분이다. 일본에서 70만 부가 팔렸다든가 여세를 몰아 우리 나라에서도 여러 일간지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저자는 주된 취미인 일본 무용을 못 하게 되어 적적하던 차에 시인인 아들의 권유로 92세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추억

아이가 생긴 걸 알렸을 때

당신은

“정말? 잘됐다

나 이제부터 더 열심히 일할게“

기뻐하며 말해 주었죠.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벚꽃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



저금

나 말이야,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면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외롭다고 느낄 때

그걸 꺼내

힘을 내는 거야

당신도 지금부터

저금해 봐

연금보다

나을 테니까



저자가 제일 애정을 갖고 있다는 ‘추억’을 비롯해서 몇 편의 시를 읽었다.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상념이요 표현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변치 않는 무게감을 가지고 은은한 감동이 전해 왔다.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나이에도 인간으로서의 동질성과 향상력을 보여주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바로 그것이 암울한 고령사회에서 그녀가 희망의 상징이 된 이유이리라. 그녀가 다소곳하게 밝히는 ‘비밀’을 보면 웃음이 싱긋 나온다.  


비밀

나 말이야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아

99세라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고 싶은 걸



100세에도 언어를 갖고 있으면 새롭게 도전하고 성취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확인하는데 가장 강력하고 수명이 긴 도구일지도 모른다. 나는 ‘글쓰기전도사’답게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양 기분이 들떠, 수강생 여러분에게 최근에 있었던 일을 시로 옮겨 보자고 독려했다. 그리하여 그 중 고령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시 한 편이 탄생했다.



나이든 소녀들

늙은 동창들 모처럼 연말콘서트 보는 날

그 고고하고 우아떠는 내 친구 영숙이 택시를 타고선

‘예술의 전당’이 떠오르지 않아

‘전설의 고향’에 가자고 했다네

“그래도 운은 맞췄네”

깔깔 웃음보 터지는 나이든 소녀들.



처음이라 내가 많이 도와드렸지만 다들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삶과 글 사이에 그다지 넓은 간극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성큼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다음 타자로 다른 분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한 분이 새로 들어오셨다. 늘 수업에 나오던 분인데 얼굴이 퉁퉁 부어서 못 알아볼 뻔 했다. 그동안 난소암이 임파선으로 번져 다시 입원을 하셨고, 링게르를 맞느라 시간은 못 맞췄어도 내 얼굴이라도 보러 오셨다는 것이다. 환우회라고는 해도 다들 건강해 보이고 고운 모습이어서 멋모르던 마음이 바짝 긴장이 되었다. 전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할 때마다 내 덕분에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고 유독 고마워하던 것이 실감이 났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항암치료로 넘어 갔다. 정작 수술은 마취를 하니까 그냥 지나가는데 항암치료가 더 힘들다고 했다. 얼마나 아픈지 이번에는 실신까지 하셨다는 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항암치료를 여섯 번 받았다는 한 수강생은 나중에 온 분이 스물여덟 번 째 항암치료를 받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만 경험이 없는지라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털이란 털은 다 빠져요!”

말수도 적고 조신한 분이 불쑥 내뱉은 말에, “어머니! 그게 바로 시예요.”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무엇보다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비명처럼 솟아오른 말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 어떻게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표현을 이끌어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픔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아픔도 덜해지고, 그 다음 생각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에 내 아픔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위로는 또 얼마나 큰가. 그것이 시바타 도요가 생생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글쓰기의 위력인 것이다.  입원한 분에게 보내는 편지도 같이 써야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 살아 있으면 내가 머플러 떠 줄게”라는 말이 오가는 병원에서 동병상련의 정을 글에 담아 건네야겠다.


시를 포함해서 어떤 글도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 꾸미거나 에둘러 갈 필요가 없다. 고상하거나 예쁜 말로 꾸미면 내 삶의 결곡함을 드러낼 수가 없고, 그만큼 치유효과도 적어진다. 항암치료 같은 극한상황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문제에 정공법으로 다가갈 때 비로소 삶도 글쓰기도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IP *.254.8.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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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1.01.14 11:25:10 *.97.72.95

날마다 진주보다 영롱한 눈부신 삶의 축제가 열리고 있군요.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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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1.01.28 11:24:43 *.97.72.95
댓글을 달려다 보니 은행에서 빌려온 책을 여태 잊고 있었네요.

그것부터 읽고 읽어볼께요. 땡큐!!! 복받으실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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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1.14 13:09:40 *.254.8.163
써니 잘 지내지요?
혹시 읽을 책이 필요하면 ...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라는 책 읽어보았는지요?
50세에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자를 화자로 한 책인데
저자가 하버드 신경학 박사라는 전문성도 믿음직하고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 혼났네요.

하루하루가 진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더라구요. 문득 생각나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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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9 09:11:14 *.40.227.17

명석 선배님~ ^^

저두..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을.. 많이 뵙게 되는데여..
ㅅㅁ님~, 이거이가 정말 안 돼서.. 처음엔.. 에~.. 하며 머뭇거렸는데여..
이제는.. 어머니~, 가 넘 자연스럽게..^^

어머니.. 단어에 확 꽂혀서.. 공감이.. 화~악
불확~, 깊지 못하게 스리.. 하구 계시져.. 헤헤^^

시가.. 구엽구.. 참 다정스러워여.. 
무엇보다.. 선배님의 따땃한.. 얘기가 더해져..
글을 읽는데.. 점점 마음이.. 따스하게 뎁혀져여..^^

다음 편.. 무쟈게 기대돼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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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1.20 10:18:55 *.108.49.65
ㅎㅎ 구엽기는 불확이 더 구엽지요.
-- 언 놈이 이 구여움을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는지 망할!^^
마음을 뎁혀주는 글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겠지요.
내 관심사와 글의 초점이 서서히 그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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