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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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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9일 17시 44분 등록

작가가 되고 싶었다.

소질이 있군. 꽤 좋은데! 한 번 도전해 보지 그래? ....... 가능성이 있어!

나의 글을 보는 이마다 한 마디씩 거들어 주는 그 황홀함에, 나는 매번 도전의식에 고취되었고 적지 않은 기대감을 내심 마음속에 품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했다, 아니 책을 사랑했다라고 고백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유치원 다닐 나이쯤엔 초등학교 언니 오빠들이 독후감 때문에 억지로 읽어야만 했던 위인전과 교양문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정독하여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어 드리는 게 나의 유별난 즐거움이었다.

한창 나가 뛰어 놀아야 할 아이가 그렇게 책에 열중하는 모습은 '저 아인 분명 학자가 될 거야' 라든지 '아마 글쟁이가 되겠지' 와 같은 아이의 장래 모습까지도 결정짓게 만드는 확정된 믿음을 가지게 했다.

'저렇게 혼자 책만 읽다가 외톨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저것 좀 봐, 책벌레야! 우리 집 책값은 보통 집보다 두세 배는 더 든다니까!' 하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는 엄마의 얼굴은, 어떨 땐 휘영청 뜬 보름달보다 더 환하게 비춰졌다.

 

나는 역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소질이 있었고 꽤 좋다는 평을 들었으며, 의심 반 기대 반 섞인 고무적인 파이팅도 여러 번 듣게 되니,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누군가의 글짓기 숙제를 대신 해 준 그날 밤, 나는 혼자 빙긋 웃으며 내가 완성한 원고지 20장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숙제를 부탁한 아이의 엄마가 그 시절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열두시에 만나요 부라보 콘’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와서는 최우수상 이라고 쓰여 있는 상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상장에는 000 라는 남자 아이 이름이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 그 후에도 친구들의 부탁과 청탁이 간간히 이어졌지만,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같은 달콤하고 알량한 댓가를 바라고 글을 쓴 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쓴 글들이 어딘가에서 흐뭇하게 읽혀지고, 그런대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고 행복할 뿐이었다.

 

장래 희망을 묻는 어른들의 질문에 주저 없이 ‘작가요!’ 라고 대답하던 나의 자신감이 슬금슬금 꼬리를 내리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입시를 1년 남짓 남겨 놓았던 탓에 안 그래도 들들 우리를 볶아대던 국어 선생은 ‘대학 입시대비 논술’이니 ‘창조적 글짓기 입문’이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특별 수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모두들 한숨을 폭폭 몰아 쉬며 어려운 기색을 표했지만, 내가 어렸을 적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 콘’을 상기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는 걸 다른 친구들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첫 작문 수업 후, 흥분된 마음으로 결과지를 받아 들었을 때, 난 분명 시험지가 바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주제부터 다시 확인하세요, 전체적으로 논리가 약하고 짜임이 엉성함. C+. 빨간색 볼펜으로 여러 군데 꼼꼼하게 첨삭된 시험지를 받아 들고 나는 한참을 멍청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시험지를 조용히 한 손으로 구겨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쳐 넣은 그 날 이후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얘기는 누구에게도 쉽사리 다시 꺼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작가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크면서 알게 된 아주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작용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는 글 쓰는 것을 나보다 훨씬 좋아하며 동시에 재능을 갖춘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작가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아쉬워하거나 내 재능이 묻혀 지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완서나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손에 들고 유유자적 독서 삼매경에 빠져 지내는 것이 어쩌면 글쟁이가 되는 것 이상으로 멋진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고대하는 독자로서의 즐거운 기다림, 신선하고 걸출한 신인들의 등단을 누구보다 기쁘게 박수 치며 환영할 수 있는 제 3자의 여유가 허락되는 이런 위치를, 도대체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어쩌면 내가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를 창작의 고통과 배고픔 까지도, 모조리 대신 짊어진 그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나는 이만큼 떨어져 세상을 지켜보며, 즐기며, 때로는 감동하며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주인공으로 삼고자 하는 인물로서, 혹은 그 주변인물로서 이 세상을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작가가 되지 않은 이유, 그것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아주 사소한 이유들이지만, 그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유들로 인해 내가 얻은 삶의 위안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창하고 특별한 것이 되었다.

내가 작가가 되지 않은 이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짜릿한 희열과 달콤한 환상을, 어떤 부담감이나 조급함도 느낄 필요 없이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작가가 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겠느냐고.

내 앞에 놓인 누군가의 책 한 권을 집어 들며 나는 다시 따뜻하고 위트가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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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12.29 18:16:18 *.36.210.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작가가 될 자질이 누구보다 풍부한 것 같으네요.^^ 작가 되는 이유는 각자 저마다 여러 의미가 있는 거겠지요. 살다보면 우선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돌아보기 위해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새로운 눈 뜸, 세상에 대한 사랑과 연민 내지는 염원 등등 할 말이 많고 이야기가 하고 싶어질 때가 또 있겠지요. 책을 읽고 정리하며 쓰는 과정 등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점점 진화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얼마나 유익하고 좋을까요. 아예 쓰지 않을 작심보다 가능성과 함께 관심을 열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에요. 님의 글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또 기다려질 것 같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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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12.29 20:46:59 *.138.74.13
읽기 편하고 재미있고 주제 명확하고 가능성이 많은 분이세요. 파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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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12.30 09:29:33 *.248.75.23
작가가 되지 않는 이유를 적은 글을 읽는데
왜 작가가 되고 싶은 저자의 마음이 읽히는 건가요.
쓰는 게 그대의 숙명이라면
언젠가는 쓰는 고통을 피해갈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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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13:54:16 *.38.42.99
대학때부터 간간이 써 온 저의 이야기들이랍니다.
벌써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지난 추억들을 들춰보고 싶을 때면 이렇게 틈틈이 옛 일기장을 넘겨 봅니다.
지난 추억은 저라는 사람을 보다 차분하고 정결하게 다듬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쓰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곳의 소중한 분들
2008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시고 2009년을 멋지게 맞이하세요!
저는 믿는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하루가 될 거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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