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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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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일 13시 03분 등록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온통 하얗게 질려 있다.  하늘이며 바닥이며 사람들까지도 여름 태양빛에 쨍그랑 쨍그랑 쇳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에어컨이 팡팡 틀어져 있는 가게 안은 다행히도 실제의 더위를 까마득하게 잊게 해 주고 있어, 도너츠를 싸들고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만 밖의 어찔한 더위를 느낄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잔뜩 찌푸려진 얼굴은 팥빙수 세 개와 도너츠 한 박스, 그리고 아이스 커피 두 잔이 포장된 봉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더욱 확연하게 찌그러졌다.

배달.  고작 이만 원도 안 되는 금액에 배달이라는 서비스까지 붙여 주는 걸 보면 이놈의 빵집은 절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사장 몰래 입을 삐죽거리며 나갈 준비를 한다.  사장은 초등학교 교사들 배달이라며 신경을 각별히 써야 한다고 야단이다.  가끔씩 우르르 몰려 와 매장 한 켠을 전세 놓은 듯 앉아 떠드는, 잘난 척 하는 젊은 교생 선생 몇 명과 가운데 머리가  비어 있는 늙은 남자 선생일 것이다.

보따리 세 개를 품에 힘겹게 받쳐 들고 모자를 눌러 쓴 채 가게를 나섰다.

여지없이 쏟아지는 하얀 광선.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머리가 후끈후끈, 등에선 땀이 줄줄, 다리는 후들후들.

토성 초등학교 2층, 교사 연수실....... 교사 연수실....... 입으로 작게 중얼거려 본다.  드디어 초등학교 정문이 보이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1층 계단을 올랐다.  사실 별로 무겁지도, 부피가 크지도 않은 배달이었지만 왠지 심술이 나고 달갑지 않은 건 미칠듯한 햇빛과 더위 때문이었다. 


햇빛이 사라진 복도는 시멘트의 냉기 때문인지, 가게의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시원한 공기를 뿜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미닫이문을 스르륵 열고 두리번거렸다. 교실은 썰렁하게 비어 있다.  다들 어디로 간 거야?  품에 받쳐 든 보따리들이 쏟아질 듯 위태롭다. 

보따리를 내려다 놓고 여유로운 척 교실을 한 바퀴 슥 둘러보았다. 벽면에 가득한 아이들 그림과 아기자기한 소품들.  삐뚤빼뚤 낙서같은 그림들, 맞춤법과는 거리가 먼 받아쓰기 공책, 주제가 무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찰흙공작까지 거기엔 초등학교 1, 2학년의 거의 모든 활동이 담겨져 있었다.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잘했어요' 스탬프가 세 개나 찍힌 것도 있고 겨우 하나 찍혀 있는 것, 시큰둥하게 '검' 자만 찍혀 있는 것까지. 아이들은 자신의 공책과 그림을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어 대기도 할 것이며 또는 풀이 죽어 선생님을 안타깝게 올려다 볼지도 모를 일이다.

어렸을 적, 내가 일기장을 검사맡으러 선생님 책상에 졸졸 따라가면 앞머리가 풍선만큼이나 부풀어 있는 선생님이 검은 안경너머로 흘깃 일기장을 넘겨 보고는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던 기억이 있다. "참 잘했어요."

그리고는 파란색 스탬프로 쾅쾅 '참 잘 했어요' 를 두 개 혹은 세 개 찍어 주셨다.  정말 열심히 일기를 썼는데도 도장을 두 개만 찍어 주시는 날엔 그게 얼마나 섭섭하고 화가 나던지 하루 종일 선생님한테 뾰로통하게 굴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일기를 제대로 읽어 보신 일이 거의 없었던 분이었다.

오십 여명이나 되는 우리 반 아이들의 일기검사를 단 10분 만에 끝내시는 선생님이었으니까. 그래도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점수를 주는 건 찝찝했는지 하나 건너 둘 건너 아이에게 징검다리 도장을 찍어 주셨으니 그리 무심하신 분도 아니었으리라.

언젠가 도장 세 개를 받은 짝꿍이 자랑하는 게 너무 샘나서 선생님 몰래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그 도장을 일기장에 콩콩 박고서는 새침하게 눈을 깔고 일기장을 펼쳐 놓았던 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누군가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한 뭉치나 받아야 맘이 편한 나는 어째서 아직 샘많고 욕심많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 걸까.

오늘도 누군가가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쾅쾅 찍어 준다면 난 더욱 힘을 내서 열심히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서투르고 자신 없는 어떤 일들은 어쩌면 그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지 않은 누군가 때문일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순진한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나이다.

2002년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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