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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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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7일 23시 52분 등록

과거를 돌아보고 떠오른 장면에 대한 키워드를 노트에 적어 보았다.
지극히 사적이고 예민한 키워드를 제외한 나머지를 옮겨 적고 그와 관련된 기억나는 장면들을 묘사해 본다.
 
 
# 유년기 : 유치원, 형제
 
난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대부분 그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슬럼가에 산 것은 아니다)
물론 유치원에 다니고 안 다니고의 여부는 가정 형편에 따라 정해졌다.
그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마주쳤던 동네 아이의 유치원 가방이 물끄러미 바라봤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했지만 무의식적으로나마 ‘현실인식’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대부분 형제가 있었다. 형, 누나, 또는 동생..
그 부분에서는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친구들과 싸울 때 특히 그랬을 것이라 추측되고..
그래서 자주 동생 낳아달라고 떼를 썼던 것 같고..
내가 8살이 되고 나서야 그 '바램'은 이루어졌다.
 
 
# 초등학교 시절 : 산수, 야구, 핸드볼, 미술, 늦됨, 성실
 
학교 입학 초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참 뒤에야 들은 얘기지만 어머님께서 1학년 때 학교를 방문 하셨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지진아'라고 하셨다나.. 그리고 몇 개월 뒤 다시 찾아 뵈니 그때는 늦된 아이라고 표현 하셨단다.
 
공부에 대한 개념은 없었지만 산수에는 강했다. 지금 돌아보면 직관적으로 답울 도출해 냈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수우미양가'로 표시된 성적표를 받았는데 유일하게 산수만 '수'를 받았고 2학년 1학기 때도 그랬다. 2학년 2학기로 접어 들면서 '수'의 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6학년 마지막 성적표에는 한 과목만 '우'를, 나머지 과목은 모두 '수'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미술은 어떻게 '수'를 받았을까?
아마 담임선생님의 배려였을 듯..
난 그림 그리기, 글씨쓰기는 젬병이다.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곤 했다.
그림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제 없지만 글씨에 대한 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야구를 즐겼다.
그래도 그때엔 우리 팀에서 투수에 4번 타자를 맡았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학교에 핸드볼 팀이 생겼고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선수로 선발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또래들에 비해 유난히 커 보였는데 중학교 진학 이후로 더 이상 크지 않더라.. 친구들은 그맘때 쑥쑥 자랐는데..)
 
핸드볼 팀에서도 주전으로 뛰었다. 공격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무척 맞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에도 대체로 소극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훈련이 고되다 보니 방과 후 훈련에 참여하지 않고 땡땡이 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난 거의 출석율 100% .. 적어도 성실성 하나만은 확실히 인정 받았다.
 
 
# 중ㆍ고등학교 시절 : 고립, 나락, 부적응
 
중학교 재학 때까지는 성적이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반항적으로 변해 갔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내 인생 최악의 시기.
주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라는 존재 자체가 불만이었고 무의미 했다. 성적이 하위권까지 내려갔다.
가고 싶은 대학도 없었고 갈 수 있는 대학도 보이지 않았다.
공부하기 싫은데 공부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철저한 부적응자였다.
고3 말미에 '위기감'이라도 느꼈는지 조금 '정신 차리기' 시작했다.
 

# 대학시절 : 자유, 외지생활, 내성적, 이성교제, 외모 꾸미기

 
남들 알아주는 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난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중고등학교 시절을 암울하게 보낸 데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고 좋은 기억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던 고등학교 생활이 끝났다는 생각에 즐거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라도 열심히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서울 생활권을 벗어났다. 2년간 서울서 천안까지 등ㆍ하교를 했고 나머지 2년은 그곳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학교 생활은 대체로 재미 있었다. 오랜 방황 끝에 얻은 자유. 그 자유를 적절히 잘 누렸다. 전반적인 학교 성적은 그냥 그랬지만 친구와 선후배 간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
술은 배웠고 담배는 배우지 않았다.
비교적 성실하게 시간을 보냈고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하지만 고충이 없지는 않았다.
암울한 고교시절을 보냈던 탓에 성격은 극도로 내성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 들일까?'
늘 그런 식이었다.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면 비난 받을지 몰라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매사에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이성교제는 거의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친구들은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에게 미팅 주선해 달라 졸라 대며 자리를 마련하고 애인도 만들곤 했다. 나도 덩달아 한 두번 끼어 봤지만 상대방이 날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자리에 나가도 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곤 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말을 잘 하거나 혹은 잘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면 몇몇 커플이 새로 생겨났다.
난 늘상 혼자였고 여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스타일인가 보다 싶었다.
결국 졸업 때까지 미팅 딱 세 번했고, 연애 경험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를 꾸미는 데에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친구가 무스를 잔뜩 내 머리에 처발랐고 보다 못한 선배가 미용실로 끌고가 미용사에게 내 머리 모양을 주문해 주었다(그런데 머리 다하고 나서 계산은 선배가 안해주더라).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이후로는 처음 가보는 미용실이었다.
그런데 머리 하고 나니 주변 반응이 꽤 괜찮았다.
그 후론 이발소 대신 미용실을 찾아 다녔다
 
사회에 나가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학교 선배 아버님의 주선을 받아 기업 농장(양돈장)에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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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9.01.08 04:20:32 *.220.176.217
소심함이라.

대학시절 이후의 이야기도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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