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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9일 11시 53분 등록
꿈벗 프로그램에 3월에 참가를 했었고 그 한 달 뒤에 모임이 있었다. 우리 모임이 있기전 한달 전 쯤에 4기 연구원들이 모임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연구원들은 마지막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할 말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중 하나인 몽치스 멤버 "홍스"의 유서를 들었다. 정말 비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죽음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내안에서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름대로 약발을 받아 유서를 한 번 적어 보겠다고 했는데 5달이 지나도록 끝내지 못하고 있다. 이 가을에 한 번은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글을 시작해 본다. 아무래도 유서보다는 내가 죽는 자리의 풍광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먼저 내 강점인 컨텍스트재능을 발휘하여 내 삶에 들어왔던 삶 혹은 죽음에 대한 기억들을 생각해 보고 내가 원하는 죽음의 자리의 풍광을 그려보고자 한다.
 
=
1.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어릴 적 죽음에 대한 기억은 우리 마을 어떤 아줌마의 죽음이다. 아마 다섯살이나 여섯살쯤이었던 것 같다. 담장너머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다. 왜 울었는지도 나도 모른다. 그나이에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상여소리가 슬펐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여소리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커서도 텔레비전에서 상여소리가 나거나 동네에서 상여소리가 나면 참 마음이 차분해 졌었다. MBC에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서 상여소리와 묘다지는 소리 갈은 것을 CD로 발간했다는 것을 알고 일반판매가 되지 않는 그 자료를 구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일하는 처형에게 부탁하여 CD를 복사했었다. 결혼전에 고 김광석씨의 음반이나 소리꾼 장사익씨의 음반과 같은 그런 약간은 우울한 음악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이게도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그런 음악을 멀리하고 어쩌다 가끔 한번씩 듣게 되었다. 결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같이 일했던 사람과 요즘 다시 일할 기회가 생겼는데 얼마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는 참 우울한 모드였는데 지금은 달라졌다고 말이다. "죽음"을 단순히 "삶의 마감"이 아니라 삶의 완성으로 파악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를 만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2.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죽음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할아버님의 죽음이다. 아버지는 병으로 집에 계셨었다. 돌아가시기 한달 전 쯤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집(다 큰 후에 가보니 어찌 그리 야트막한 곳인지)에 올라오셔서 아버지와 한 잔을 나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큰 집으로 돌아가셔서 아프기 시작한 후에 한 달쯤 되는 날 일가친척들이 임종을 한다고 모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들에 나가신 어머님을 모시고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어머님을 모시고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가족들에 둘러쌓여서 주무시듯 그렇게 돌아가셨다. 고모부님이 맥박을 짚어보시고 이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기 전 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그렇게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그 당시에 할아버지 친구분이 연세가 20살은 적을 정도로 그렇게 장수하시면서 건강하시다가 그렇게 편안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3.
재수생 시절이었다. 아버님께서 나에게 호식아 여기 무엇이 만져진다라고 하셨다. 밖에서도 만져질만한 혹덩어리 병원에 예약을 하고 아버님을 모시고 병원엘 갔다. 병원에서 위장조영촬영을 하는데 덩어리가 보였다. 의사가 stomach cancer라고 의견서에 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호자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말씀은 안드리고 어머님 그리고 누나들에게 먼저 알렸었다. 보호자를 데리고 온다한 들 무엇이 바뀔 것인가?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자 대학병원에 입원을 해서 검사를 했는데 위암 말기라고 하였다. 이 정도로 클 정도면 한 두해가 아니었을텐데 하고 의사들이 말했다고 한다. 결국 손을 대 보았자 희망이 별로 없다고 집에 가셔서 맛있는 것 많이 드시게 하라고 의료진이 이야기를 해서 퇴원을 하셨다. 아버님 당신께는 아무도 정확하게 병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셨을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평소에 오지 않던 친구분들과 친척들이 한 번씩은 다녀가셨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위암이라 먹지를 못해서 바짝 마르셨다. 돌아가시는 날 나는 독서실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고통스런 모습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 울면서 여기 저기 전화를 하고 왔다.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죽음의 순간 이디오피아 난민처럼 배만 불룩하고 말라버린 모습을 기억한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4.
친구들의 죽음에 관한 기억들이다. 처음으로 접한 친구의 죽음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바닷가에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친구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했던 친구였는데 자살하려는 친구들은 언제나 자신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는데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그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탓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렇게 심각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대학교1학년 시절 그 해는 참 이상하게도 친구들의 죽음의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먼저 여자 친구랑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나서 죽은 친구는 그렇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한 친구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주일이 되지 않았서 어머님마저 돌아가셨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또 한 친구는 87~88년 그 시절에 독재에 항거하며 자살을 택한 한 친구의 소식이었다. 누가 투신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고보니 고등학교 동기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에서 죽은 친구의 이야기다. 이 친구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였는데 "성"이 바뀐 친구였다. 중학교때는 심씨였는데 고등학교때는 이씨로 바뀐 참으로 기구한 친구다.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배에서 물을 빼고 항해를 하러 나가면 배 밑바닥에 물을 채운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친구는 그 물탱크를 점검하러 갔다가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위에서 탱크 문을 닫고 출발하는 바람에 익사를 한 것이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공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나는 시체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본 친구들에 말에 따르면 머리가 다깨어져 있었다는 말을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5.
이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짐승들의 죽음에 관한 기억이다. 이러한 죽음은 대부분 내가 만들어낸 죽음들이다. 살생의 현장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개구리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생물시간에 개구리를 해부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지천에 개구리야 널려있으니 개구리를 여러 마리 해부를 했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를 생각해야 봐야 할 때가 있다. 단지 비유로서 그렇다는 이야기인지 실제로 그렇다는 이야기인지를 말이다.
자기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개구리 삶기 이야기"의 진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개구리를 서서히 삶으면 개구리가 기분좋게 삶겨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정말 그럴까? 내 경험상 그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개구리는 잡혀서 솥에 들어갔을 때부터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으려면 꼭 두껑에 돌을 놓든지 아니면 두껑을 잡고 있어야 했다.
이런 것을 두고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아닌 것이라도 거기에서 한 자락의 깨달음을 읽을 수 있는 우화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개구리를 십자가에 묶어서 햇볕에 놓아두자 개구리가 배 터져죽었다. 따뜻한 햇빛도 생물을 죽이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닭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가 방학때 외갓집에 갔을 때로 기억한다. 중학생 때 였는데 외갓집에서는 손자가 왔다고 닭을 잡으려고 하셨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하는데 그 일을 내가 맡았다. 그냥 비틀지 않고 나는 모가지를 꼭 잡았다. 닭의 눈꺼풀이 감기면서 모진 숨을 쉬었다. 숨을 끊어야 하는데 아무리 손아귀힘이 쎈 나였지만 그것은 역시 역부족이었다. 결국 칼로 닭의 모가지를 쳤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닭은 죽어서 나의 한때의 몸의 일부분을 구성했을 것이다.
뒤돌아 보니 그것이 우리의 삶이 다른 무엇인가의 죽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삶의 역설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죽이더라도 최대한 빨리 고통없이 죽여주는 것이 "덕"을 배푸는 것이라는 망나니나 백정들의 깨달음을 조금은 이해할 만한다. 어릴 적 내가 모르고 저질렀던 살생된 존재들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6.
이렇듯 꿈벗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대학교 1학년 시절에 철학 기말시험에 자유주제로 써낸 A+을 받게된 것도 바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의 생각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어떤 보상이나 처벌이 두려워 현세를 잘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죽음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삶 자체는 소중하며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사후의 세계"를 믿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사후의 세계"의 심판 때문에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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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것과 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많이 해왔다. 근래에도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아직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꿈벗 소풍에 앞서 이 글을 적고 싶었는데 먼길을 앞두고 죽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뒤로 미루었다. 그만큼 아직도 당장 죽을 준비는 되지 못한 것 갈다. 어쨌든 "유서"를 쓰겠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상상을 해 본 내 죽음의 자리의 풍광은 그리 비장한 것이 아니라 farewell party(잘가라잔치)와 같은 풍광이 자꾸 머리속으로 들어온다.

내 죽음의 풍광

1. 죽음의 순간
나는 내가 살면서 친했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있다. 모두들 침울하지 않고 표정이 밝다. 한 달 전에 사랑하는 아내가 떠났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하나의 일이 이루어졌다. 사랑하는 아내가 내가 먼저 죽으면 그 마음이 아플 것을 걱정해서 딱 한달만 아내보다 더 살기를 바랐었다. 아내와 나는 건강하게 살다가 이렇게 천수를 누리고 돌아간다. 돌아갈 그곳이 어디인지 지금에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로 그냥 그렇게 돌아갈지 아니면 물질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무엇이 이루어져 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 아니 특별하게 그것이 알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어떤 보상을 위해 이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나는 싫었기 때문에 이렇게 웃으며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죽음이후의 세상이 있건 없건 나는 이제까지 주어진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즐겁게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다.
"내가 돌아간 후에 여러분이 어떨지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말만은 하고 싶다. 여러분과 함께한 이 생이 참 즐거웠다고"

2. 죽기 1년전
이제까지 건강을 유지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제 돌아갈 준비를 차근 차근 해야겠다. 중년시절에 새롭게 태어나면서 마음에 품어왔던 사막여행을 했다. 구본형 사부는 언젠가 나에게 말했다. 사막은 여자의 속성을 지녔다고..(마흔즈음에 만난 구본형 사부는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막을 와보니 그 말뜻을 이제서야 알겠다. 초아선생님이 지어준 호 "戊山"이라는 것을 받고 황무지의 산(사막의 산)을 상징한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서 알았을 때 그 뜻의 크기가 커서 감히 쓰지 못하고 고이 마음속에 간직을 했었었다. 이제 사막여행을 하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이 나이에 사막을 여행을 하겠다고 하니 모두들 말렸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사막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떠났고 무사하게 돌아왔다. 사막은 나를 품어주고 허락해 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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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죽음의 순간의 풍광을 그려본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내 머리속에 맴돌았던 이미지는 일단 두개였다. 앞으로 더 많은 풍광이 그려지글를 바란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야기 하기 위함이 아니다. 삶의 거울로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허무"와 "슬픔"에 빠져 있던 나에게 사랑하는 아내의 존재 즉 무엇인가를 지극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음"에서 또 다른 삶을 보는 것이 가능하게 해 주었다.

위험한 먼길을 앞에 두고 아직도 "죽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도 나 자신 "죽음"을 두려워하고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고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머리속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아직 몸이 따르지 못하니 반쯤의 "알아챔"이 아닐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늘 죽어도 곧 여한이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반응을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원한 나의 멘토이신 구본형 사부님의 글을 잠깐 인용하고자 합니다. 죽음의 이야기는 반드시 삶을 전제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저 나이를 먹어 삶을 마감하기 위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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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어려운 것은 일을 당장에 빨리빨리 해치우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치우는 것"이 중요하다 보면 일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삶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그저 나이를 먹어 삶을 마감하기 위해 늙어 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것이다. 해뜰 녘,아침,점심,해질녘, 저녁 …시간마다 달라지는 햇빛처럼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러므로 시간마다 독특한 아름다운 빛깔로 변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낯선곳에서의 아침"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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