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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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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1일 12시 54분 등록
 

책 한 권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읽어 치웠다.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 ‘성장’이다. 360페이지. 다 읽고 나서 눈물이 솟구쳤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소멸을 보아버린 탓이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지루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저자는 책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을 풀어내는데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는 독자가 늘어질 틈을 주지 않고 발빠르게 장면을 바꾼다. 소제목도 없이 숫자만 매겨진 챕터마다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와 빠른 속도로 새로운 국면을 펼쳐 놓는다. 

여든의 연세로 어머니의 적적함은 끝이 났다. 그 해 가을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은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떤 날엔 반세기 전에 있었던 결혼식과 장례식엘 다녀오셨고, 어떤 날은 이젠 백발이 다 되어 버린 그 옛날의 아이들을 위해 일요일 오후 내내 준비한 저녁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기도 했다.

상황으로 시작하든,

1931년 1월,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뉴욕으로 가셨다.

시점으로 시작하든, 그의 첫 문장은 나를 빨려들게 한다.

해럴드 고모부는 거짓말의 귀재였다.

이처럼 단순한 문장조차 그의 리듬에 얹혀 지면 달라진다. 그는 60년 세월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강약을 두어 재창조했다. 극히 부분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의 삶의 전모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는 그가 만들어낸 속도에 빠져든다.

“어떻게든 잘되겠지.”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에 올라가면서부터 어머니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그것은 꼭 필요한 부분만을 추려낸 과감함과, 생생한 인물들, 살아있는 대화체의 덕분이다.

1981년 가을, 미미와 나는 태어난 지 석 달 된 손녀를 보러 작은아들의 집이 있는 버지니아로 차를 몰았다.

갑자기 30년을 뛰어넘는 파격, 시작과 끝을 같은 장면으로 맞춘 구성의 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스토리텔링에 적절한 속도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그것뿐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한가하면 정교했다. 박진감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되, 장면장면에 대해서는 충분한 묘사가 이루어졌다. 그가 묘사한 인물은 어찌나 생생한지 꼭 아는 사람 같고, 그가 묘사한 공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꼭 한 번 가 보고 싶고, 그가 묘사한 시간은 어찌나 감미로운지 나도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성탄절이 되면 어머니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다정다감해지셨다. 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어머니는 집에서 만든 맥주를 깡통들에 담아 밀봉해서 효모가 발효되도록 욕실에 보관해 두셨다. 욕실 옆에 붙어 있는 주방에 앉아 있다 보면 가끔 욕실에서 펑하며 깡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터지는 것을 감안해서 늘 넉넉한 양을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을 당신의 옷장 안에 넣어 두고 소녀와 같은 기쁨을 맛보셨다. 성탄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신들린 듯이 음식을 만드셨다. 케이크와 파이를 만들고 소나무와 산타클로스 모양의 생강 쿠키도 구워 내셨다. 오후에는 도리스와 나를 데리고 키작은 소나무가 한 가득 쌓인 시장에 나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르셨다. 어머니는 정확하게 좌우 대칭인 나무를 찾아서 수십 그루의 나무를 헤집곤 하셨다.


모리슨빌은 20세기와의 투쟁을 준비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못 되었지만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유년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햇살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여름에는 미나리아재비가 들판을 노랗게 뒤덮었고 헛간엔 건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뒤뜰에는 보랏빛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나무에 달려 있었고 할머니 댁 처마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덩굴에서 실려 온 바람에는 라벤더 꽃내음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담장엔 들장미가 만발했다.


남자들이 모두 일터로 간 뒤 여자들이 잠깐 낮잠에 드는 오후가 되면 나는 뙤약볕을 쪼이며 깊고 경이로운 침묵 사이를 걸었다. 침묵은 너무나 깊어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중에도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도시 아이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할 음악을 연주했다. 닭장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리면 그건 닭이 알을 낳았다는 신호였다. 처마 아래 매달아 놓은 작은 그네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 그건 산들바람이 할머니 댁 뒤뜰을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즈 버츠 씨네 마구간 앞을 인디언마냥 잽싸게 지나가다 보면 말이 파리떼를 쫓기 위해 꼬리를 휘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끼낀 개울가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개구리에게 다가갈 때 퐁당 소리가 들리거든 그건 개구리가 사냥꾼을 발견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신호음이었다. 낮잠에 든 집들 사이를 지나며,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철 지붕들이 딱딱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 녹초가 되어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똑딱똑딱 시계추 소리를 들으며 최면에 빠지듯 잠이 들곤 했다.
 

정신없이 빨려들게 하는 이야기의 힘! 이미지는 물론 소리와 냄새까지 살아있는 그의 장면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서사’와 ‘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묘사’란 사물과 공간이 어찌어찌하다는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서사’에 치중하면 속도감은 있으나 자칫하면 건조하다. ‘묘사’에 치중하면 실감은 있지만 잘못하면 지루하다. 우리가 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처럼 좋은 교과서를 발견해서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밖에도 배울 점이 무궁무진한 책이지만 말이다.

IP *.251.1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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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3.31 17:00:03 *.36.210.230
나는 무엇을 읽든 속도가 느려요.  그래서 정말 신경질 나요.
어찌나 화가 나는 지 그래서 성질나는 것을 모조리 긁어내어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emoticon

어떻게 하면 단숨에 360페이지를 읽느냐고요. 글쎄..... ???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어려웡~ ㅠㅠ 잘 읽으면 얼른 읽고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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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4.01 10:32:47 *.108.49.86
이 책이 워낙 나와 코드가 맞았지
나도 그렇게 빨리 읽는 편 아니에요.
또 요즘은 느리게 씹어 읽는 것을 즐기기도 하구요.
일부러 좋은 문장을 손글씨로 따라 써 보기도 하고
-- ㅎㅎ 송년회 때 선물받은 만년필 덕분이지요!
저자의 느낌을 천천히 반추해 보기도 하구요.
느끼면서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 정말 잘 읽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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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엽
2010.03.31 17:21:34 *.216.38.10
전, 지금 당장 그 책 주문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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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4.01 10:34:35 *.108.49.86
내가 완전 삘받은 책을 권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 특히 수강생- 영 아니라고 할 경우가 있더라구요.
이런 상황, 혹은 경험을 어떻게 의미있게 끌어가야 할 지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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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2010.03.31 22:37:25 *.34.224.87
책의 내용도 좋으나, 선택하여 버무려주시는 맛도 일품입니다.  구입하여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겠군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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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0.04.01 10:35:53 *.108.49.86
제 글이 상당히 주관적이라
축약도 심하고 그다지 친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말씀 감사해요. 전체모임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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