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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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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9일 11시 08분 등록
 

조촐하나마 글쓰기강좌를 하고 있다. 간혹 쓸 것이 없다는 사람을 본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대가 가장 골몰하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 쓰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나 깨나 나를 점령하고 있는 그것, 애써 다른 생각을 좀 해 보려고 해도 어김없이 되돌아오곤 하는 지점, 그것은 나의 강박관념일 수도 있고 결핍일 수도 있겠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강박관념을 이용하라고 말한다. 작가란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고, 우리를 욱조이는 강박관념에는 힘이 있기 때문에 회피하지 말고 차라리 정면돌파를 하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딱 어울리는 사례를 하나 기억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 만화 ‘누들누드’를 보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읽은 유일한 만화책인 그 책에서 저자 양영순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性을 형상화했다. 동서고금에 性처럼 은밀한 금기어가 또 있을까. 누구나 관심 있고, 누구나 관련되어 있는데, 누구든지 슬쩍 피해가는 영역!  한쪽에서는 과도하게 부풀리고 다른 쪽에서는 기묘한 시치미가 공존하는 영역. 누구도 내놓고 공론화하거나 전수하지 않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람 없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은밀한 영역을 한 청년이 밝은 대낮으로 가져온 것이다.


기상천외의 상상력이었다. 비밀스럽게 가려져있어 누구나 쉬쉬하는 性을 이렇게 건강하게 까발리다니, 깜찍한 도발성이 감탄스러웠다. 아마 꽤 히트쳤을 것이다. 그 책을 읽은 지 얼마 후에 우연히 양영순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결혼을 한 후 성적 긴장감이 사라져 그만한 창작을 할 수가 없노라고 토로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 인터뷰가 굉장히 인상 깊어서 잊어버리질 않는다. 25세의 한창나이, 시달리다 못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사안을 창작을 통해 멋지게 해소하는 예술의 특권이 이해되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절실한 주제를 파고들 때 생생하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도 이와 연관되는 예화를 발견할 수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여느 때와 같이 워크숍을 연 첫 날, 10분간 글쓰기를 하고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아직 첫날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글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이나 ‘너무 예민했던 성격’ 처럼 첫수업에 무난한 글들이 발표된 후 데이비드라는 청년이 사람들의 얼을 빼고 말았다. 바로 이런 식으로 글을 읽었던 것이다.


마스터베이션, 마스터베이션, 마아아아아스...마!마!마!마! 마스터. 바 베 베 베이 션 션 션......


데이비드는 워크숍 내내 다른 주제로는 글을 쓰지 않았고, 그녀는 그런 데이비드에게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글의 규칙을 따르기보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하는 행위의 이면에 폭발적인 에너지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글에 적절한 재갈을 물릴 수 있다면,  주제가 바뀌더라도 이 에너지가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나는 데이비드라는 청년에게서 만화가 양영순을 본다. 데이비드는 ‘누들누드’를 창조하기 직전의 양영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결핍에 대한 지독한 집중,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파괴본능 혹은 칵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절망을 살짝 비틀어 창조에 쏟을 때 우리는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 비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나탈리 골드버그가 강박증의 변두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한 것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러니 그대를 괴롭히는 것들을 외면하지 말라. 그것이 흔드는 대로 흔들려주고 끝까지 파고 들어가 보라.  그대가 가장 갈급한 것에 힘이 있고, 그대의 강박증에 기회가 있다. 그러는 나는 결핍을 다 표현하고 있느냐고?  물론 아니다.^^ 살짝 에두르고 즐거운 거짓말을 섞어 소설을 써 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


@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 카페 http://cafe.naver.com/writingsu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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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건친구
2010.04.09 13:18:55 *.120.80.253
자신이 가장 사랑에 빠져있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도 글쓰기를 생활화하는 좋은 방법이죠?!
정성된 글쓰기를 할 시간이 없는 저는 요즘 틈틈히 아이의 말을 채집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함  와 보셨으니까 아시죠? ^^)
너무너무 사랑하는 대상이라서 그냥 머릿속에서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글을 쓰는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더라구요.
물론 전혀 다듬거나 하지 않고, 그저 생각의 흐름을 쏟아놓는 거라서 다소 거칠긴 하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하고 하는 것은 글쓰기 훈련 뿐 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한층 깊어지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인 것 같습니다.
엊그제 채집한 아이의 말도 하나 남겨놓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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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워킹맘의 아이말 채집놀이 _ 2010.4.8.


짱구는 못말려? 다인이도 못말려!

우리 둘째아이(4세, 38개월)는 성격이 무지하게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다.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거나 자신이 하는 말이 전달이 잘 안되면
0.5초 내에 눈물이 주루룩 흐르며 싸이렌 소리같은 울음이 터진다
(결코 비유가 아니다. 정말 싸이렌 소리 같다. ㅡ.ㅡ)
울지말고 말하라고 타이르고, 예쁘게 말해야 뭐든지 해준다고 달래봐도
워낙 타고난 천성인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게다가 감정이 불타오르는 것도 무지하게 속도가 빠르고
예측하지 못한 일에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기분나쁠만한 일을 선행적으로 차단해주는 것도 쉽지 않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에 그 아이가 좋아하는 영양제를 먹겠다고 떼를 썼다
원래 영양제는 아침 저녁 밥먹고 두 번 주는 것이고 이미 두 개를 다 먹었는데도
아이는 타협할 기세없이 막무가내로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밤에 울리느니, 하나 주고 말았는데....
잘 먹다가 갑자기 벼락같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 깨물어먹었어~깨물어 먹었어~~앙~~~ 딱 하나만!, 앙~~~~~"

벼락같은 울음과 속사포 같은 대사가 흘러갔다.

사정인 즉슨,
천천히 빨아먹어야 오래먹는데 자기도 모르게 신나게 깨물어먹고는
너무 빨리 먹어버려서 속상하다고 우는 것.
또 하나 얻어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도 생각이 들었는지
그게 속상해서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포기를 못하겠는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높이 들며 "딱 하나만" 더 달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

빛의 속도로 벌어진 아이의 격한 감정과 울음, 그 이유의 아이다움이 너무 귀여워서
나와 친정엄마는 껄껄껄 웃으며 또 한 알의 영양제를 꺼내주었다.
아이의 눈에는 아직 채 흘러떨어지지도 않은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입으로는 새로 준 영양제를 천연덕스럽게 야물야물 씹고 있다.

"아이고, 요 깜찍한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아이의 볼에 뽀뽀를 하며 중얼거린다.
제 자식이라고....
이렇게 울고 떼를 써도 너무너무 귀엽고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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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건친구
2010.04.09 22:56:52 *.180.96.4
음흐흐흐..
용기를 주시니..함 해볼까요?
이런 글도 여기 올려도 되나...쫌 망설였거든요...emoticon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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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4.09 15:43:58 *.108.49.36
하하, 자기주장이 기막히게 확실한 친구네요!
나는 아들애가 '형님반'일 때 공개수업에  갔는데
'아우반' 녀석이 콩닥 때리는데도 아들이 대응을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 기억이 있는데
다인이는 그럴 염려는 없겠네요.^^

동건친구님 말씀대로
글쓰기가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데 동의합니다.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펼쳐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이든, 즐거움이든, 정보든 주게 될 테니까요.

어린 꼬마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하지요.
아이들은 모두 시인인 것이 맞구요,
저도 애들 어려서 조금 채집하다 만 것이 아까운데
맘먹고 채집하시면 쓰일 데가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친구님, 댓글로 두기엔 아까운데요?
앞으로 가끔 정식 포스트로 올려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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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10.04.10 05:38:21 *.72.153.59
저도 데이비드에게 후한 점수를 줬어요. 한샘은 아주 많이 감동먹으셨나봐요.
전 이야기를 하다보면 겹핍이 졸졸 풀려버려요. 그게 일종의 제갈을 물리는 것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쓰거나 그리는 에너지로 사용했으면 해요. 머리 속에서 들끓을 때 확 잡아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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