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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 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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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4일 10시 48분 등록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촬영을 하다가, 벽이 나타나면 다리가 썩을 정도로 그 벽을 본다고 했습니다. 업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그 작은 조각에 폭발적인 정성을 다 한다고 할 때, 과연 사람들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직업'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을까? 쿠로자와 아키라는 막힌 벽에서 자기다움을 느꼈고, 그 결과물이 그의 영화입니다. 거장은 자신의 업에서 삼매를 경험합니다. 일이 명상이며, 일하되 휴식합니다. 고요하게 돌고 있는 팽이처럼.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남습니다.

MBTI, 버크만, 스트롱 역량 검사등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모닝페이퍼로 제 내면을 작은 노트에 수 권 쏟아냈습니다. 하염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케이지에 갇혀 있다가 방목을 즐기는 돼지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떨떨 했지만 금방 꿀꿀거리며 땅에 머리를 부볐습니다. 동산에 올라 제 영혼과 접붙었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방사했습니다.

그런데, 쏟아내고 쏟아내도 무엇을 해야 겠다는 뚜렷한 무엇인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드에 나가지 않으면, 그린이 보이지 않듯이. 책상에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현재의 내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결과일뿐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했습니다. 지금 내 상황이 좋건 나쁘건, 그 결과는 엄연한 내 책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감정이 가라앉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했습니다. 상황은 내 내면의 거울일 뿐이며, 상황이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 인과응보. '현재를 충실히 산다면, 미래는 걱정할 것 없다'는 팃낫한 스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이렇게 시간내서 정리해야지 얻는가?라는 생각에 자기연민도 왔고, 이제는 하루 빨리 필드에 나가야 겠다는 조급함도 일었습니다. 막상 필드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주저했는데, 왜냐면 나는 여러번 필드에 있었으나, 라운드를 제대로 마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사람과 업무로 구성됩니다.일을 우습게 알면,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지면 업무 성과도 오르지 않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도 좋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이 일도 잘 합니다. 바람직한 선순환입니다. 그 반대라면,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내 일을 찾겠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말입니다.

문제는 내 욕망에 대한 무지보다는 작은 일을 우습게 아는 마인드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하고 싶을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볼일이 아니라, 더 현실에 몰두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득, 서태지, 장정일, 전도연, 박찬욱이 다른 일을 했더라도 매우 뛰어나게는 아니더라도, 잘 해냈으리라는 느낌이 듭니다.처음에는 변방에서 시작할 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욕망의 핵심부에 자기를 정확하게 포지션할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기 보다는 목표가 그들에게 러브콜을 보냅니다. 이 위대한 사실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라며 겸손하게 말합니다.

검사 결과. 예술과 기획.분야에서 많은 흥미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분야입니다. 내 욕망을 찾아간다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저에게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다워 진다는 것은 나다운 그럴듯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어도, 답을 찾고자 '나답게'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닌가? 소름끼칠 정도로 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쪼개고 쪼개면 전자와 원자가 남습니다.이런 의미에서 모든 직업은 같습니다. 특정 기술을 연마하기 보다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닦습니다.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는 섬세한 눈을 키웁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부딪히는 일상에 정성을 다하면, 누구나 일가를 이루는 신나는 세상이 됩니다. 지금 일이 마치 그 일인 것처럼, 오랫 동안 꿈꾸어 왔던 그 일인 것처럼. 아주 작은 일에 수많은 가치와 배려를 파생시킨다면, 우주는 저에게 길을 제시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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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1.04 12:54:22 *.70.72.121
새해에 올리는 깔끔한 글 잘 읽었습니다. 늘 더 나아지는 모습만 보이시는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약간 두렵기도 합니다. ^-^

모든 직업을 통한 깨달음은 같을지 몰라도 모든 직업이 다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더 궁극적으로는 다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야 하는 일상은 그 작은 종이장 하나가 천차만별의 차이를 이루어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가깝고 자유로울 수 있는 관계를 모색할 줄 아는 것도 커다란 깨우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쩐지 친해질 것 같다는 생각, 자주 뵐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것은 저 혼자만의 망상일런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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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08.01.05 00:45:32 *.207.136.252
말씀 들어보니, 사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는 생각이 드네요. 조화로운 관계도 사람 텍스트를 잘 읽어야 가능한데, 지금껏 책만 읽어왔네요.(그 책조차도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저도 써니님 뵙고 싶어용^^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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