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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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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31일 11시 51분 등록
스물 한번째 날

야콘은 당뇨에 좋단다. 처음 보는 야콘을 땅속에서 끄집어 내어 실한 놈과 쭉정이를 가려서 상자에 담는다. 책을 보다 잠이 스르르 들었다가 사모님의 야콘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맘처럼 되질 않았다. 어제 막대기를 꽂아 놓은 것 같았던 등짝은 아예 통째로 아파오고, 잠을 잘못 잔 탓은 아닐 텐데 목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간신히 방바닥에서 등짝을 떼어내고 어제의 흙 묻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대 숲을 지나 뒷산 밭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도 않건만 한 발 한 발 어기적이다. 내 슬로우모션을 따라 모든 것들이 천천히 지나간다. 야콘이 기다리고 있다. 간혹 감자도 눈에 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거의 쉼 없이 캐내고 담고를 반복해 일을 끝냈다. 내일은 읍내에 나가 이메일과 전화들을 하리라 맘 먹으며 독서바위에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일이 끝난 후 피우는 담배 맛도 괜찮다싶다. 이러다 끊을 수 있으려나 내심 또 겁이 난다. 맘 먹으면 할 수 있다. 아자아자!!

이 집 식구들은 모여 앉으면 똥 얘기다. 처음보다는 더 잦은 똥 얘기의 이유는 숙변배설이 가까워 와서일 것이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확실히 더 많은 일을 했으니 꼭 숙변이 나올거라는 둥, 어제는 기미가 좀 보였냐는 둥 포도밥을 먹으며 연신 숙변얘기다. 효진씨와 할머니는 무조건 내일을 마지막으로 보식을 하겠노라 하고, 목사님도 끄덕이신다. 내게는 기왕 시작한 거 언제 또 이 어려운 걸 하겠냐시며 숙변이 나올 때까지 해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하신다. 흡~ 혼자 얼마나 더 포도밥으로 연명해야 하나. 제발 숙변이 빨리 나오라고 혼자 요가비디오를 틀어 놓고 따라 해본다. 이 애타는 심정을 창자야 너는 아뇨?

내일은 아침부터 청소를 해야겠다. 내 방도 방이지만, 거실도 포도액으로 끈끈이 장판이 되었다. 개울에 가서 흙거지룩 추리닝을 도로 말끔하게 두들겨 빨고, 읍내로 반납할 것들을 챙겨 돌려드리러 가야겠다. 직장 상사들과 친구에게도 이메일을 쓰고 내 근황이 이렇노라 ‘변경영이야기’ 주소를 카피해 붙여드려야겠다. 책상 치울 사람이 없어 돌아갈 때까지는 책상 빼라는 얘길 안 하시겠지. 물론 선처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쓰겠지만, 돌아가서 짤릴 각오를 하고 온 터라 겸손히 물 흐르는 대로 나아갈 것이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 1년간은 지금까지 이어진 관계들을 다시 정리하고 회복해 잘 다듬어 볼 것이다. 편지도 쓰고 전화도 드리고 내 고객들에게 환한 미소로 찾아 뵐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쁘다. 그 분들이 있어 내가 지금껏 신기하리만치 버텨온 것 같다. 삶의 경이는 새로운 관계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내 경우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인연들이 새로운 친구이자 연인들로 나를 감싸주었다. 그것이 행복이었음을 그들에게 꼭 전할 것이다.

농사가 새로운 화두로 자리잡는다. 흙 냄새가 좋다. 햇볕과 바람이 좋다. 시간의 결실이 신께 감사하게 만든다. 자연은 그렇게 내게 행복감과 풍요로움을 한없이 준다 하는데, 나는 여태 알아채지 못하고 아스팔트와 회벽들만 보고 만져왔나 싶다. 내년에는 배추, 무, 콩, 고추, 상추, 호박, 가지, 파 등등을 꼭 심어 볼 것이다. 인터넷으로 공부를 일단 하고, 주위 어르신들을 활용해야겠다. 엄마는 아마 별걸 다 한다 하실 테지만, 첫 농사를 수확해 김장을 담글 때쯤은 분명 놀라실 것이다. 한 여름 소나기가 올 때면 호박전도 해 먹고, 깻잎과 상추로 쌈도 싸먹어야겠다. 생각만해도 군침이 돈다. 며칠 전부터 하루에 한 두 가지씩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음식이 있다. 월남쌈이 그랬고, 떡볶이가 그랬다. 아~ 먹고 싶다. 보름이 지나면서부터는 환각증상이 있다.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면 으레 냄새도 진하게 나는 것이다. 이럴 수가……. 또 침이 고인다. 물이나 실컷 먹고 잠을 청해야겠다.
2007-10-30 10:30 PM

IP *.152.17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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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1.01 01:16:12 *.70.72.121
gina님, 그대 글 읽다가 11월이 되었네요. 내게 강점 중에 명령테마가 있는 데 명령할까요? 안 해도 되죠? 11월이라구요. 그대의 답변을 기대할께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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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 줌마
2007.11.01 07:29:32 *.233.240.182
지연씨, 농사 잘 배워둬요.. 나도 가끔 생각해 봤는데.. 부모님 살아계실때 그거 배워 놔야겠더라구 울 부모님도 텃밭 가꾸셔서 김장도 하시고, 웬만한 채소 안 사서 드시거든.. 인터넷도 좋지만 그런 텃밭 가꾸며
부모님 자주 찾아뵈는것도 효도이니, 앞으로 좀 더 다가가 가려고..

어느새 20일을 훌쩍 넘겼네.. 얼른 그 '똥'님이 출현해 주셔야 하는데...
잘 견디고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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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7.11.01 10:04:51 *.122.143.72
지연님, 지리산 단식 첫날부터 지금 스물 한번째날까지 잘 견디고 있는 당신의 모습 글을 통해 잘 보고 있어요.

때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지리산에서 당신 본연의 모습을 찾아감과 동시에 새로운 의지와 각오를 새겨가고 있는 시간들이 무척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세요. 현실로 돌아와 다시 과거로 회귀할 생각은 진정 없는거죠? 그쵸? 지리산 유점요양원에 모든 과거를 두고 나오세요. 지리산의 칠흑같은 어둠에 당신의 어둠을 묻고 떠오르는 힘찬 태양의 정기를 받으며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세요. 참, 담배는 피는 습관까지 완전히 묻고 나오세요~~

지연님의 글을 읽다보니 쏘옥~ 빠져듭니다. 매일매일의 짧은 글 속에 웃음의 지뢰밭이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그 지뢰밭을 밟으면 여지없이 웃음이 터지네요. ^^ 항상 그런 밝은 웃음, 햇살과 같은 당신의 모습 보여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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