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나의

일상에서

  • 맑은
  • 조회 수 313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11월 12일 23시 03분 등록
445658369.jpg1103096502928868.jpg


작년. 아들 녀석 운동회에 참석하다. 구경만 할려고 했으나, 아빠 엄마가 참여해야 게임이 가능했다. 몸이 풀리자, 아들에게 승리의 아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승부욕이 생긴다. 마지막이 계주였는데, 몇년만에 전속력으로 뛰었더니 근육이 파혈되었다. 운동장을 1/4정도 돌았을때, '뚝'하고 근육이 끊어졌다. 나머지는 깽깽이로 돌았다. 덕분에 한달 동안 다리 깁스를 하고다녔다. 다리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게 나가서 써빙을 볼 수도 없었고, 그림 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집에서 쉬면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 연구원 활동에 그나마 집중할 수 있었는데,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도 많았다. 캠벨을 다시 읽다. '천복을 따르라'는 말이 가슴을 울리다. 우리는 살면서, 천복을 알아본다. 가슴이 뛰면서, 눈에서 빛이 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일상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고 강해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된다.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캠벨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꿈꾸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달간 깁스를 할때가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었다. 항상 목표지향적이고, 무언가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한 습관인데, 그때만큼은 마음을 놓고 흐느적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잡다한 생각, 이를테면 돈을 벌고 경력을 쌓고, 어떤 사업을 할것인가?등이 가라앉고나자 딱 하나가 남다. 그것이 '그림'이었다.

난 미대를 나오지 못했다. 미대를 가고 싶다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학교를 다녔는데, 사회생활하면서 '그림, 디자인, 예쁜것, 영상에 대한 욕구'는 항상 뒷통수를 따라다녔다. 회사가 인사동에 있을때는 주변에 화랑이 많았는데, 점심 먹고나면 혼자 화랑에 가서 그림감상을 했다. 여하튼 그림은 나와 무언가 관계가 있기는 하다. 그림 그리는 것이 돈도 안되고, 나중에 취미로 하자는 다짐을 몇번이고 했으나, 항상 그림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학원 매니아인데, 그림 그리는 학원도 다녀보고, 잘 가르킨다는 학원에서 상담도 받아보았다. 맨 먼저 성수동에 '꼭두'라는 일러스트 학원에 가다. 전혀 그림학원이 있을 것같지 않은 곳을 깁스한 다리로 깡총 거리며 갔다. 추계 예술 대학 졸업생들이 설립한 학원이다. 그들은 학원이라는 말보다는, '그림 공동체' 내지는 '예술 공동체'라는 말을 썼다. 등록금이 몇백만원 하지만, 사실 남는 것도 없고 , 그림 그리는 사람들끼리 좋은 취지에서 만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장사꾼인 내가 계산을 해보아도 남을것 같지는 않다. 그림도 좋고, 선생님도 좋았지만,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주 4일 수업에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 수업이다. 아무리 시간이 자유로운 자영업자라고 하지만, 부담스럽다. 그래도 굳게 다짐을 한 이상, 2011년에 다니기로 결심하고 예약금까지 냈다.

얼마후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화장품이 음식장사 보다 시간적으로 자유롭다. 음식은 사장이 이것저것 다하지만, 화장품은 판매원들이 판다. 이 사실을 모르고,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생각에 쫄아서 그림 그릴 생각은 엄두도 못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자, 또 다시 그림에 대한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기저기 학원을 찾기 시작했고, 스케쥴도 짜보고 계획도 세워보다. 이렇게 계획만 6개월동안 세웠다. 이리저리 재느라 시간만 보내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한점이라도 드로잉을 했더라면, 좀더 내 영혼과 가까워졌으리라. 이런 내 모습이 한심해서, 더 굳게 마음을 먹다. 

오늘은 '힐스'라는 일러스트 학교에 가다. 입학 설명회가 있는 날이다. '힐스'를 알게 된 것은, 얼마전 출간된 '달려 토토'라는 그림책을 보고서다. 원래 아들녀석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내가 먼저 감동 받다. 아들은 아직 어려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그냥 대충 그린 것 같은 그림책인데, 내 마음을 흔들었다 본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 그림책을 일반 어른들에게 보여주면, 시큰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얻는다. 난 그런 사람이다. 타인과 틀린 것이다. 이 책은 실제로 해외 유명 일러스트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그 작가가 '힐스'라는 학교를 졸업했다.

작은 교실에 의외로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얼굴을 보니, 다들 나처럼 생겼다. 영혼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은, 그림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설립자분이 직접 학교 설명을 해주시다. 'illust'라는 말은 빛을 비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 말고, 타인의 이야기와 무언가에 빛을 비추는 것이 일러스트 작업이다.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사건도, 그림으로 그리면 의미를 가진다. 일러스트는 김춘수의 '꽃'이다. 이름을 불러서 빛을 비추는 일이다. 이 말이 가슴에 깊이 흘러들었다. 

2년 과정인데 학교측이나, 학생측이나, 어려운 것은 역시 결심이다. 중간에 그만두면 학생도 학교도 낭패다. TO가 생겼다고 학생을 더 뽑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해주셨는데, 작가의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서브잡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또, 고민중이다. 고민한다고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일단 저지르지 않는 이상 해결책은 없다. 내년에는 일을 잔뜩 벌려 놓았는데, 이것이 가능할까? 지금 하지 않으면, 점점 더 하기가 어려워진다. 분명한 것은 그림에 대한 욕망은 계속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때문에, '그리는 것'은 맞다.
IP *.48.104.7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