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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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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8일 17시 34분 등록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개인 간의 싸움이 아니다. 조선수군과 일본수군 간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일본이라는 한 국가가 조선이라는 국가를 침략하여 일어난 국가 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과 해상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무려 7년 간 지속됐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의 발병 원인과 배경, 개전 전후의 조선 조정의 준비와 대응, 개전 초기의 전투 등을 간단하게라도 살펴보아야 한다.


준비하지 않은 자와 준비된 자의 싸움

조선에게 임진왜란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조선의 침략은 준비된 것이었다. 100년의 내전을 통해 일본군은 정예화되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풍부한 전투 경험과 뛰어난 검술, 거기에 조총이라는 막강한 신무기가 더해진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직후부터 조선 침공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1587년 당시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시게(宗義調)는 조선으로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라는 사람을 보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준비하고 있으니, 직접 와서 보고 해결 방안을 마련하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그의 말을 여러 차례 무시했다.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조선의 무덤덤한 반응에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하겠는가”라며 탄식했다.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쓰시마 도주가 된 소 요시토모((宗義智)도 1598년 자신의 부하였던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와 승려 겐소(玄蘇) 등과 함께 조선을 방문하여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정은 무시했다. 1590년 3월, 소 요시토모는 선조에게 '조총'의 갖다 바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정은 일본을 잊었다.

쓰시마 도주가 대를 이어 가며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쓰시마 섬(對馬島)은 지리학적으로 볼 때 일본보다 한반도가 더 가까웠고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쓰시마 섬은 조선의 인삼과 약품 등의 양국 교역을 중개하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쓰시마 도주의 안내로 쓰시마를 경유해 일본의 목적지로 간 적도 있었다. 쓰시마 도주는 쓰시마 섬이 양국 사이에 끼어 있어 전쟁이 터지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 요시시게와 소 요시토모도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조선의 조정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조정은 1590년 일본의 내부 동태를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로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을 보냈다. 통신사 일행은 약 1년 동안의 조사를 마치고 1591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을 다녀 온 두 통신사의 의견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황윤길은 선조 임금에게 ‘히데요시와 일본군이 반드시 조선을 칠 것’이라고 주장했고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그럴 인물이 못 된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보고서를 올려 일본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임금께서는 일본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며 “황윤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황윤길은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김성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결렬했던 당쟁으로 비추어 보면, 동인(東人)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에서 동인 측에 속하는 김성일의 의견이 힘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황윤길은 서인(西人)이었다]. 게다가 김성일의 이야기는 듣기 좋은 이야기였고 조정이 원하던 이야기였다. 조선은 일본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의 바람일 뿐이었다. 전쟁의 징후는 더욱 짙어져 갔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도착한지 한 달 후, 일본의 사신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들이 조선에 통고한 것은 놀랍게도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겠으니 길을 내달라’는 최후통첩이었다.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전쟁은 예정된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조정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얼마 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모의 부하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다시 조선을 찾았다. 그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에게 일본의 전쟁 준비 상황을 알리고 침공일이 3월 1일에서 4월로 연기됐다는 정보까지 주었다. 송상현이 이를 조정에 보고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참고자료>
이순신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1, 2, 이순신역사연구회 지음, 비봉출판사, 2005년
*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 2004년
*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옮김, 서해문집, 2004년
* 징비록,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서해문집, 2003년
*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지용희 지음, 디자인하우스, 2003년
* 불패의 리더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윤영수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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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기원
2005.07.11 03:52:45 *.61.95.10
이미 내부에 꽉차있는 자에게는 더이살 넣을 것이 없다. 오직 겸손하면 좋겠다. 가진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하기에 그 가진것을 지키려다 망할뿐...늘 비우고 새로 채워야하겠습니다. 홍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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