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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4일 09시 03분 등록
오만방자한 내 모습을 돌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업하느라 할퀴고, 뜯긴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는 것이 먼저인데, 같은 방법으로 타인을 해하려하다. 따듯하고, 경우 바르며, 인자한 마음이 보물이다. 먼저 다가가서 가볍게 마음을 전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허씨 집안은, 모두 천재였다. 하지만 불운했다. 아버지, 허엽과 장남 허봉은 객사한다. 딸 난설헌도 시집가서, 세 아이를 먼저 보낸뒤 자기마저 27세 나이에 눈을 감다. 동생 균은(홍길동의 저자) 반역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난설헌뿐만 아니라 모두 시대를 잘못 만났다. 개인의 재기와 시대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다. 

작가 최문희는, 천재 여류시인의 속내와 모습을 훌륭히 형상화한다. 음식과 의복, 날씨, 자연의 묘사는 담백하다. 난설헌은 끝까지 자신의 순수함을 지켰고, 그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저세상에 가다. 작가 최문희도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글이 곱다. 글이 고운 사람은 마음도 곱다.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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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초희는 자꾸만 구겨지는 마음이 다림질되지 않는다. 덜 마른 빨래를 손다림질하는 어머니 김씨 곁에서 초희가 익힌 것이 있다면 살므이 구김새도 숯불 다림질이 아닌 맨손으로 곱게 매만질 수 있다는 손다림질의 지혜였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부릴 때도 손다림질의 온기로 다독이라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가르침이라고 초희는 알아들었다. 27

차양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오늘따라 무겁다. 두 손을 깍지 낀 초희가 어긋나서 맞물린 열 손가락을 새삼 들여다본다. 열 손가락의 맞물림 같은 것이 결혼인가, 너무 조여잡은 손가락들이 어느새 저려든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반드시 행보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로의 체온을 묻히고, 서로의 지문을 가슴에 감으면서 서로의 숨결 소리를 듣는것, 그것이 결혼이란는 만남일까. 초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댁 사람들과 어우러져 잘 해낼지, 그것에 대한 불안도 가슴 밑바닥에 안개처럼 고여온다. 바람이 일어 처마끄에 달린 붕어가 몸부림 친다. 구름 저편에 산이 산 너머 저편에 마을이, 그 말을 지나 강이나 들....바람이 처마끝 풍경을 때리고 지나간다. 53

초희의 검고 깊은 눈망울에 그렁하니 눈물이 차올랐다. 오라비들의 책갈피를 기웃거리며 글을 즐겨 읽고 쓰는 초희를 지켜본 어머니 김씨의 가슴은 아리고 쓰렸다. 대놓고 글을 읽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사랑채에서 글을 읽히고 시를 짓게 했던 것을 극구 말리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57

허엽은 부인 김씨가 곳간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사위 우성전한테서 들었다. 오곡밥을 간간하게 지어 아주까리 잎으로 싼 주먹밥을 한두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허엽은 그런 부인의 활달한 처사가 내심 대견했다. 안살림은 물론 자칫 각진 자신의 대인관계에서 비롯된 서걱거림도 부인이 잘 다독거려주고 있었다. 61

생각은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바람살이 아니다. 빗물이 고이듯 생각이 고이면 궁리가 생기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각이 허물리고 둥글고 휘어지고 곁가지가 생기게 마련이다. 초희는 불길한 생각들을 뿌리친다. 모든 것을 좋게, 편안하게, 올곧게 풀어내는 습관이 필요하다. 열다섯 해를 살았던 익숙한 곳에서 생소하고 어려운 공가으로 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마감해야 한다. 62

성립이 달려가 달이를 폭 끌어안았다. 뼈 없이 말랑하고 찰진 몸 소으로 빨려들어가는데 몇 초도 안 걸렸다. 달이의 몸은 여름에는 차돌처럼 차고, 겨울이면 햇솜같이 따스했다. 계절에 따라 조화를 부리는 달이의 몸뚱이가 성립의 오감을 물어뜯으며 방만하게 난도질했다. 그렇게 밤마다 비의처럼 간직했던 육체의 향연은 이제 캄캄한 막장에 도달한 셈이다. 83

성립이 또 한 차례 찰진 달이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열아홉 살, 달이의 무르익은 사타구니 속에 휘감긴 사내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무한의 열락으로 비상했다. '아! 이것이 생의 진미로고다.' 늙은이처럼 중얼거리는 성립을 밀어내며 달이는 앙탈을 부렸다. 85

송씨의 눈에는 그런 며느리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오만방자하게 보였다.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거는 기색 없이 언제 보아도 범접할 수 없는 차가움이 서려 있는 몸가짐, 그것이 송씨의 분노를 늘 부채질했다. 장원급제 하라는 아들 성립은 기방에 들락거리는데, 며느리라는 것은 짬만 나면 서책을 끼고 있으니 원통하고 분했다. 145

아름답게 태어난 것도 영암숙모에게는 멍에가 되었다. 출중한 미모 때문에 영암숙모가 겪어내고 있는 동서 시집살이를 그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손끝이 여물고 꼼꼼해서, 영암숙모의 손을 거쳐 나오면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며, 옷은 몸에 걸치는 옷이 아니라 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솜씨가 빼어났다. 더구나 성격이 음전하고 얌전하면서도 경우 바르고,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성품이라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바른 말, 바른 소리로 그 입이 차고 맵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미에게 있어 영암숙모는 가장 다정한 어른이고 벗이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153

그미가 시집와서 두 번이나 과거에 낙방했지만, 그미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미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벼슬이 없어도, 먹을 것이 궁해도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고 영혼과 영혼이 교감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주는 남자이길 바랐다. 같이 앉아 시를 나누고, 하늘과 별과 세상 끝까지 흘러가는 물에 대해 이야기 나누리라, 그런 남편과 더불어 세상의 끝까지 동행하리라 생각했다. 사람의 냄새가 나는 일을 더불어 나눌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남편은 첫아이가 들어서면서부터 외박을 했고, 글 읽기보다 노는 데 힘을 모았다. 글방보다 기방 출입하느라 모든 것을 허비했다. 190

금실의 손바닥이 명주바지 입은 무릎을 쓸어내린다. 까칠거리는 게 거슬린다. 손바닥만 거칠고 험한 게 아니다. 간혹 금실의 발뒤꿈치가 살갗에 닿으면 성립은 소스라쳐 이불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나고는 했다. 어릴 때부터 찬물에 손을 넣고, 궂은일에 몸을 놀린 탓인지 금실이는 뼈마디가 굵고 힘살이 올라 폭 안기는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밤일만은 따를 계집이 없었다. 무슨 비법을 쓰는 모양인지 찰떡처럼 달라붙는 맛이 온몸의 뼈를 노골노골 녹였다. 206

'천재도 과하면 독이 된다 하지 않던가. 그 독으로 얻은 빛남의 대가로 스스로 소외되고 불행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야' 227

덧없고 부질없는 허욕은 그나마 죽으면 그만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그미에게 귀중하고 아까운 것은 사람의 곱고 다스한 마음이었다. 정성, 그 마음이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받으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246

저 연약함, 저 섬세함, 저 도저함을 김성립이라는 작자가 어찌 넘나들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든다. 질투 어린 마음이 아니다. 그 자리를 넘보는 심사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미가 남편과 더불어 나누어 가질만한 화두가 있기나 했을지, 새의 근원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말과 말을 통하거나 시를 읊으며 소통이 가능했을지 그 답답했을 삶이 슬프다. 267

'아름다워라. 아침에는 찬이슬 푸른 향기로, 햇볕 중천에 기운 한낮에는 투명한 얼음기둥 같은 귀품과 청정함으로, 노을 가시고 어둠살 내리는 박명 속의 그대는 한 떨기 수국이라, 대나무 주렴발에 걸러낸 달빛 한 몸에 받아내며 숨죽인 그대 모습은 이승의 아녀자가 아닌 선녀의 자태라, 이렇게 요요한 황홀함을 받아줄 헌헌장부가 이승에 어디 있을꼬.....' 271

'그래서 내 인생이 그리 볼품없지만은 않았다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시리도록 처연한 눈발을 이고 선 소나무들이 있고, 가을이면 만산홍엽으로 눈을 아프게 해주었지. 하지만 이런 봄날, 새벽에 보여주는 붉은 빗방울은 아무도 보지 못한 절경 중의 절경인 걸...'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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