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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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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3일 11시 33분 등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애들 아빠가 다녀 갑니다. 누이들이 가져온 음식이 너무 많아서 주체하지 못할 때 애들 생각이 나는지 갖다 놓는 거지요. 그 집 누이들은 대단한 데가 있었지요. 딸 넷이 모두 집안 생각 끔찍이 하는 60년대식 효녀인 거예요. 그렇게 친정과 남동생에게 지극정성인 사람들 처음 봤습니다. 나도 딸이고, 시누이고 고모니까 잘 알지 않겠어요? 새댁시절 딸들이 다녀 가면 비상금 수십 만원이 생기고, 부엌이 가득 차던 생각이 납니다. 수입이 짭잘했지요.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네들은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애들 아빠가 가져 온 보따리마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네요. 참외와 사과, 딸기가 가득,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올리브유와 참깨, 잡화상 하는 큰 고모네서 왔을 샴푸세트와 과자보따리에 집안이 그들먹해졌습니다.


그 중에 드룹나물은 산에서 채취한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가  먹는 드룹 순 말고도 이파리까지 딸려 왔거든요. 이파리는 연한데 제법 날카로운 가시가 많습니다. 일일이 손 볼 수 없어 일단 씻어서 삶아 얼려놓았던 한 뭉치가 온 것이지요. 이파리 뿐만 아니라 순에도 가시가 붙어 있어서 일일이 가려야 했습니다. 다 했다 싶어 나름 성취감을 느끼며 고른 나물을 씻는데 웬걸 가시가 또 따끔거릴 때는 와락 화가 났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야생 드룹이 얼마나 귀한 줄 알고, 또 좋아하는 나물이기도 해서 다시 한 번 훑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 달라졌구나 싶었지요. 전같으면 고르기 싫어서 밀쳐두었다가 뭉글어져서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요.  상추를 씻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상추와 쑥갓은 애들 아빠의 텃밭에서 따온 것인지 어리고 순해 보이긴 하는데 흙이 많이 붙었습니다. 열 번 정도 씻도록 끝까지 새까맣고 까실까실한 흙이 떨어집니다. 흙이 잘 떨어지도록 물을 많이 담은 그릇에 상추를 조금씩 잡고 흔드는 동작이 이전과 확실히 다릅니다.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놀리는 손동작에 짜증이 섞였던 이전에 비해,  흙은 좀 묻었어도 마트에서 파는 것과 댈 수 없이 깨끗할 야채를 귀하게 여기는 티가 역력합니다.


이건 공으로 생긴 물건을 좋아라 하는 아줌마의 계산속일 수도 있고, 자식들에게 살가운 소리 한 번 못 들으면서도 여전 퍼 나르는 그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세상살이에 대한 공경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못해  차리는 밥상이 아니라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하고 오늘 하루를 힘차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지요. 아이들과 맛있는 밥 한 번 먹는 것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를 알게 된 거예요. 단출한 세 식구라도 다 같이 모이는 건 아침 뿐이거든요. 간편한 것만 찾아 삐죽 올려놓던 자취방 식단을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문득 언젠가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때는 학원 전성기라 하루에 백만 원씩 들어오던 시절인데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만 쓰고 사는 내게 엄마는 “사람이 만족을 알아야지”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구요? 많이 깨져봐야 합니다.^^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는 호기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어지간한 걸 가져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늘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을 바라보느라  탄탄하게 땅을 딛지 못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대단한 줄 알고 남의 말을 흘려듣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세월이 내 한계를 여실히 깨닫게 해 주네요. 시간은 나라는 인간을 3차원 투시경으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이제 호기가 아니라 성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즘 새로 배운 것 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네요. 자기중심적인데다 근거없는 확신이 강한 나로서는 드문 일입니다. 재미있게도 그건 딸의 데이트가 몰고 온 감정입니다. 딸이 막 첫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내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생생하게 보이는 거예요. 엇 뜨거라 싶었지요. 혼자 있는 것을 즐길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혼자 있지 못하면 머리가 뜨거워져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이지만 막상 홀로 남는 것이 실제상황으로 다가오자 정신이 아뜩해지더라구요. 무엇을 이루기는 커녕 홀로 떨어져 외로움에 쩐 모습이 떠올라 한참동안 애먹었습니다. 지금은 이 두려움을 내가 외면했던 현실감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 한 번의 식사가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를 알게 된 거지요. 불과 몇 달 전보다 또 달라진, 완연히 성숙해 보이는 딸을 보며 오늘 하루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찰나라는 것에 또 숙연해집니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요. 누군가 책 한 권을 읽고나면 열권 분량의 무식을 확인한다더니, 한 해를 살고 나면 몰랐던 것이 자꾸 튀어나오네요. 전에 나는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2007년 말이네요. 그 때는 시간, 돈, 사람을 몰랐던 것에 대해 통탄했지요. 이제는 공경, 만족, 두려움을 몰랐던 것을 확인합니다. 나이든다는 것은 거듭 무지를 확인하여 겸허해지는 일이로군요. 그래서 그 빈 자리에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이요.


전에 쓴 글에서 나는 ‘몰랐다’고 하는 것이 변명이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변했지요. 많은 사람이 종종 “몰랐다잖아” 하면서,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은 것보다는 쉽게 넘어가 주지만, ‘몰랐다’는 것이 진정한 면죄부가 되는 순간은, 정말 모르고 살아온 것들을 깨닫고 고치는 시점일 꺼라구요. 무지하게 살아온 세월과 회한을 연료삼아 남은 시간을 아낌없이 불태울 때, ‘모름’은 ‘앎’을 향한 동력이 됩니다. ‘앎’을 넘어 ‘핢’으로 가는 제단이 됩니다. 그러니 삶이란 얼마나 오묘한지요!


이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가 않네요. 이것이 또 한 번의 합리화에 그치지 않으려면 정말 달라져야겠지요. 내일이나 모월 모일이 아닌 지금 당장요. 오늘은 원고작업을 쑥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 드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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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11.05.13 13:42:07 *.169.188.35
명석님...

나는 몰랐다라고 하면 지금은 안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요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I don't know what I don't know!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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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5.13 20:03:23 *.108.80.74
아직 젊으시기도 하지만
사려깊은 분들은 매사에 무리수를 두지 않으므로 아는 것만 행해도 되리라 봅니다.
저는 천방지축이었거든요.
과거형을 쓸 수 있어서 조금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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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1.05.14 10:23:04 *.36.210.56
^^

"모르는 죄가 더 크다"는 의미를 실감하며 끙끙 살아가고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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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5.14 11:38:51 *.108.80.74
그렇지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모르는 인간은 신도 어쩌지 못할 것 같은...
내 얘기라우. ^^

다행히도 고쳐 살아볼 시간이 충분하니
처음부터 알았던 것처럼
귀신도 속일 정도로 그렇게 깜쪽같이 다시 한 번 살아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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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
2011.05.15 13:19:50 *.230.26.16
오늘 글은 특히 더 깊이 들어옵니다.

‘몰랐다’는 것이 진정한 면죄부가 되는 순간은, 정말 모르고 살아온 것들을 깨닫고 고치는 시점이다.  

많이 생각하게 되는 좋은 문구 감사합니다. 좋은 봄날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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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1.05.15 22:03:57 *.108.80.74
공감해 주어서 고마워요.

선형씨는 차분하고 사려깊게 보여서
그다지 면죄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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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3:07:40 *.93.45.60
저도 두렵습니다. 어쩌면 이루고 싶은 것을 못 이룰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그리고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챙피하고 또 미안하고, 챙피하고 미안하고 그래요.
곧 있으면 마흔이라 더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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