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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2일 09시 57분 등록

평생의 은사께서 작고하셨습니다.
내겐 어두운 밤 달빛 같은 분이셨습니다.
여기 짧은 행장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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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현모 선생님, 중요한 길목마다 그 분이 거기 서계셨다
신동아 4월 25일, 2006년 (6월 호)

나에게는 스승이 한 분 계시다. 선생님이 생각이 날 때 마다 나는 학생이 된다. 그러나 나는 좋은 제자가 못되어 드렸다. 그동안 많이 찾아뵙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나처럼 그 분을 좋아 하는 제자는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내 삶의 한 모퉁이를 돌 때 마다 그 분은 거기 서계셨고, 내 인생의 갈림길 마다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갈 길을 물어 보곤했다. 물론 직접 찾아가 물어 본 것은 아니다. 갈림길과 모퉁이를 돌아 설 때 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 그 분 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 ” 삶의 중요한 순간 마다 나는 이 질문을 꼭 했고, 그래서 이 나마 내 길을 즐기며 걷고 있는 것임을 안다. 지금도 이 질문은 계속된다.

그 분을 처음 만난 때는 1972년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을 때거나 1973년이 시작하는 때였다. 나는 재수의 피곤함에서 벗어나 얼른 대학에 들어와 빛나는 젊음을 발산하고 싶은 풋내기였다. 우리는 대학의 면접장에서 처음 만났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뭘 하고 싶나 ? ”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싶습니다”
“교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선생이며 학자입니다. 그러나 선생이기 이전에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이 대답에 대하여 별로 만족해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면접을 당하는 사람의 민감함으로도 내 대답이 호감을 끌었는지 어땠는 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이 그럴 듯한 대답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나처럼 기억을 잘 못하는 사람이 30년 도 더 된 대화의 한 끝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선생님과의 대화의 어떤 부분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만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마다 선생님은 내 곁에 현존하는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다. 나는 그 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분은 내 우상이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대학 시절 몇 개의 장면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곤 한다.

그때 70년대의 젊은이들은 주로 술을 퍼마시며 젊음을 보내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은 자유의 공기로 가득했다. 입시에 치여 지냈던 새내기들에게 대학은 유토피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가 숨통을 틔여주곤 했다. 라이락꽃 가득할 때 몰래 술을 사가지고 가 학교에서 그 향기를 맡으며 마시기도 했다. 역사학과는 짝도 잘 맞았다. 여학생 열 다섯에 남학생 열 다섯이었다. 3일에 소연, 5일에 대연을 베풀며 술을 마셔댔다. 어느 날인가 그 날도 술을 마시다 문득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고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쳐들어가자 의견을 모았다. 그 때 선생님 댁은 성북 초등학교 앞의 운치있는 한옥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작은 뜰이 정겨운 집이었다. 술이 좀 오른 풋내기들을 앞에 앉혀놓고, 선생님은 술과 안주를 내 놓으셨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자네들 담배 피우나 ? ”
대부분 이미 골초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재떨이를 가져다주시며 담배를 피우라 하셨다. 아무도 피지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술과 달리 담배는 대단히 건방지고 껄렁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 당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무례였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그 생각이 많이 나고, 결국 방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게 되니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더 낳지 않겠냐고 말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술이 들어 갈 수록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을 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벌리곤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유치한 그러나 일상 속의 무용담 속에 존재하셨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예일 대에서 그리스 로마사를 전공하신 미국인 신부인 진모덕 Murdock 선생님 조교를 꽤 오래 동안 한 적이 있었다. 서양 고대사 책으로 가득 채워진 진모덕 신부님 방은 늘 내 방으로 착각되기도 해서 신부님이 안 계실 때면 친구들이 찾아와 놀다 가곤 했다. 그날 아침은 여름 방학 기간이었고 아침부터 찌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친구들이 찾아와 이 방에서 바둑을 두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토요일 날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연구실에 잘 나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창문과 방문 모두를 열어 놓고 바둑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때 길현모 선생님이 런닝셔츠 바람으로 이 방에 들어 온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자네들 뭐하나.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가 ? ” 하는 소리에 우리는 경악했다. 이런, 선생님이 나와 계셨단 말인가 ? 선생님 연구실은 방 두 개를 건너 있었다. 놀라 벌떡 일어나 도열하듯 서 있는 우리들을 돌아 보고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 누가 제일 잘 두나 ? 나하고 한 번 두세. ” 바둑판이 벌어졌다. 중간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불을 붙여 피시지는 않았다. 바둑이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동안 불 붙지 않은 맨담배를 정말 피우시 듯 ‘후’ 품어 내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때 2 급 쯤 두셨던 것 같은 데, 오랫동안 바둑을 두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우리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친구가 있어 선생님이 이기시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바둑 한 판으로 우리를 잠재웠고, 잔소리 한 마디 없이 연구실을 연구하기 참으로 좋은 여름 토요일 오전 침묵으로 가득한 깊은 공간으로 만드셨다. 우린 늘 이런 선생님의 능력에 놀라곤 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내게 늘 놀라움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서양사 개설과 역사학 입문을 들으며 나는 수업의 진미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강의 도중 지긋이 눈을 감고 좋은 단어를 찾아내시기 위해 애쓰셨다. 이윽고 폭포처럼 가장 적합한 표현이 쏟아지고, 역사 속의 한 인물, 한 장면은 갑자기 두꺼운 먼지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그 사람들, 그 장면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장면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콜링우드의 역사학 개론을 가르치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뜻은 대략 이랬다. ‘이론이 그 자체로 모두 옳은 것 같아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우면, 직접 겪어 체험해 보아야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두 개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와 ’크리톤‘ 에서 가르친 것을 연상시켰다.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되지 못하는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 라는 가르침과 섞여 천둥 같이 내 가슴을 울렸다. 나는 그때 비코, 랑케, 크로체의 역사이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역사이론은 모두 빛나는 매력이었다. 서로 부딪치면서도 서로가 말하지 못한 영역을 보완해 주는 듯 했다. 새내기 젊은이의 풋지식은 선생님의 강의을 통해 조금씩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달달 외워야했던 연대기 속의 역사적 사실과 가설들은 처음으로 지적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선생님께 나는 앞으로 역사학자가 될 것이고,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7년 후, 대학원에 입학할 때, 역시 같은 대답을 했었다. 두 번 다 선생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길도 있다는 여운을 남겨 두신 것 같았다. 그때는 좀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혹시 선생님께서 좋은 학자가 되기에는 내 자질이 부족하다 여겨 그러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뜻은 분명히 말 그대로 바로 그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하거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거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거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는 것이다. “ 아마 그런 말씀이셨을 것이다.

중국에 이탁오라는 학자가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은 한 적이 있다.

“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선생님은 분주한 분이 아니시다. 어울려 여기저기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상하게 늘 우리의 놀이 속에 흔쾌히 자리해 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두려워한다. 그 무서움은 깊은 존경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언젠가 늦게 장가가는 친구가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갈 때 나도 따라 합석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을 뵙고 나오면서, 그 여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두 분 다 왜 그렇게 쩔쩔 매세요 ? 선생님이 어려우세요 ? ” 그렇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좋아하고,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늘 편히 앉지 못하는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분을 만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란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 살면서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좋은 선생님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 최고의 역사학자들에게서 수학했다. 서양사에 길현모 선생님이 계셨고, 한국사에는 이기백 선생님이 계셨고, 동양사에는 전해종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고 차하순, 이광린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학교의 역사학도들이 늘 부러워하여 멀리 와서 청강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봄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 난만한 5월의 교정을 걸어 그 분들이 함께 식당으로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 것을 보며 우리는 늘 감탄하곤 했다. 당대를 풍미하는 학자들이 저렇게 서로 어울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삶을 사시는구나하는 부러움을 가졌다. 우리가 마주쳐 인사하면 “그래, 밥들 먹었나 ?” 하며 웃으셨다. 우리들은 모교에 대한 자부심 보다는 역사학과에 더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힘이었다. 그러나 70년대의 대학생활은 늘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는 폐쇄되었다. 독재에 대항하는 데모와 강제적 일시 폐쇄가 반복되었고, 학기의 후반부가 없는 대학 생활은 내내 계속 되었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가 되고 모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그것은 선생님 탓이기도 했다. 나에게 역사에 대한 떨림을 갖게 해 준 분도 선생님이셨지만, 내가 대학원을 떠나게 된 것도 선생님 때문이었다. 방황하듯 대학 생활의 3 년을 보낸 후, 군대에 갔다 복학했고, 1년 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1980년이었다. 그해 첫 학기에 대학원에서 선생님과 우리들은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읽고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해 희망으로 가득 찼던 봄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지고 말았다. 그해 봄 학생들은 서울역으로 시청으로 매일 운집했다. 젊은이들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빛나는 조국을 가지고 싶어했고, 지식인들은 ‘지식인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은 긴 독재의 상처와 그늘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듯 보였다. 그러나 학교는 다시 폐쇄 되었고, 전두환 군부는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내란으로 규정했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써야할 병력이 제 국민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었다. 지식인 성명의 대표자였던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우리는 선생을 잃었다. 나의 길은 불투명해졌고, 나는 다른 분 밑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선생님께 배우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나와 그해 12월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되는 길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그 길은 결국 내 길이 되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님 소식을 가끔 전해 들었다. 춘천의 한림대학으로 옮겨 그곳에 계셨을 때, 친구와 함께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겨 주셨다. 먼 곳을 찾아 왔다 하셨다. 일주일에 며칠은 춘천에 계셨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계셨다. 그리고 나는 회사 일에 치여 사는 회사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 키우고 작은 집을 장만하고 집을 넓혀가는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선생님을 오래 뵙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도봉산 밑 아파트에 사모님과 함께 사실 때 나는 두어 번 찾아뵈었다. 언젠가 추석 즈음에 선생님을 뵈러 갔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데, 마침 선생님께서 시내에 사시는 동생 분에게 - 아우인 길현익 선생님은 결혼을 하시지 않고 혼자 사셨는데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동양사를 가르치셨다- 갈 예정이었다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고 작별했다. 사모님께서 챙겨주신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선생님은 추석 즈음의 그 빛나는 가을 속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셨다. 혼자 사는 분들에게는 명절이 더 외로운 날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명절이 되면 늘 그렇게 사모님이 챙겨준 음식을 들고 혼자 사는 동생 집을 찾아가시곤 하셨다.

이 글을 쓰다 내 노트북 한 구석에 선생님께 써 두었다가 보내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마 10년 도 더 된 편지인 것 같다. 오래 전에 써 두었지만 주인을 찾아 배달되지 않은 편지를 읽으면 왠지 추연해 진다. 삶의 지나간 한 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간 여행처럼 이미 사라 진 나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선생님께,

뵌지 2년이 지났습니다. 늘 뵙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깨어나 보니 문득 선생님이 몹씨 그리웠습니다. 짧은 편지를 드립니다.

어려울 때도 있었고 지루할 때도 있었고 그저 그러려니 건들거리며 산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도 많았고 쓸데없는 걱정에 싸인 때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처럼 때로는 넓은 강폭을 이루어 햇빛에 빛나기도 하고 때로는 좁고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흐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달 같은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살며 아주 어두운 때에도 그렇게 깜깜하지만은 않아서 가끔 하늘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별빛이 그렇게 쏟아져 내리나 하고 말입니다. 어두운 밤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있는데, 때로는 비수처럼 날카로웠고 때로는 둥글어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보였습니다.

1973년에 서강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뵐 때, 마침 햇볕이 환한 언덕을 다른 선생님들 몇 분과 어울려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는 것을 뵐 때, 저는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학생들의 빛이 되는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은 그 욕망으로 가득했었습니다.

80년 5월에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시게 되셨고, 저 또한 대학원 1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서강에 계시지 않으니 서강에서 더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한 2년 일해서 1년 학비가 생기면 유학을 떠나려고 취직을 하였었지요. 그러다 결국 눌러 앉게 되고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길이 달라져서, 사느라고, 혹은 부끄러움 때문에, 가지가지 이유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제 마음 속의 달빛으로, 어두운 길의 달빛으로 늘 그렇게 계셨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 이 질문은 어둡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살아온 오래된 물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서강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치기 어리고, 쓸데없는 명예를 좇고, 속이 허한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자입니다. 헤매며 제 길이라 여긴 길을 가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려니 하고 위로합니다.

아침에 이렇게 짧은 편지라도 쓰고 나니 그리움이 조금 덜어진 듯도 하고 더 깊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을 살며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정리하여 그것을 모아두면 한 사람의 자서전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발가벗은 자신에 대하여 말해야하는 ‘나의 이야기’ 로서의 자서전이 아니라 내게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야 말로 너무도 결정적인 내 삶의 증거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심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영향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것이 관찰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이야기라 불렀다. 선생님은 내 삶을 이룬 중요한 상징적 테마였고 질문이었고 가능한 대답의 하나였다.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학자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한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내게 이 열망을 품게 해 주셨다. 나이가 들어 연구원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너무도 분명히 훌륭한 선생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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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7.01.12 11:36:24 *.57.36.34
훌륭한 스승님을 가진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사실 저는 대학에서 선생님처럼 존경하는 스승을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대학교 학과 통폐합과정에서 저희 과를 폐과시켰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교수들의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처럼 늘 찾을 수 있는 스승님을 갖는 것은 마음의 고향을 가진 것이라 봅니다. 그런 고향이 있기에 오늘날 또 다른 스승으로 선생님이 자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 또한 삶의 스승으로 선생님을 찾았고 어느 날 선생님에 관한 글을 쓸 것이라 다짐합니다. 인생의 반을 넘은 자리에서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더듬을 수는 없지만 이미 지나온 과거의 자리를 선생님의 책으로 덮으면서 선생님의 넓은 사고를 따르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스승님은 살아생전 한 번을 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이 우리의 스승님이기에 선생님의 스승님 또한 저희 스승님이라 생각합니다.

삼가 스승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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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1.12 12:45:15 *.152.82.31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힘이었다.
살면서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좋은 선생님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제게도 이런 행운이 있음을 알았으니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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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1.12 12:48:55 *.140.145.9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길현모 선생님에 대한 선생님의 마음을 알기에 더욱 마음이
짠해집니다. 한편으로 그런 스승을 만나실 수 있었던 선생님은
행복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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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일
2007.01.12 15:12:05 *.46.159.113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모든 것들이 저의 체험처럼 생생해서 눈물이 어립니다.

훌륭하신 스승님께서는 훌륭하신 제자분을 두게 되어 기쁘셨을 것입니다.

길현모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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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2007.01.12 15:48:52 *.72.157.19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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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1.12 17:25:10 *.81.17.227
마침 젊은 연예인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화면으로 보아도 유독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교통사고로 중태라는
뉴스 앞에서 마음이 싸했습니다.

“살고 싶어”

그녀가 병상에서 남긴 한 마디가
제 게으름을 후려칩니다.
저와 비슷한 심정인지, 일간지의 날씨 기사에 이렇게 써 있네요.
-그녀가 한줌의 재로 변하는 날, 여전히 쌀쌀하겠다.-

살아야겠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삼가 고인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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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1.12 21:44:01 *.70.72.12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6년 초가을 저는 미친 듯이 한 분 선생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분의 명성도 아무것도 몰랐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프로그램 신청을 하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받으셨고 몇 마디 말씀만으로도 안도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는 참 죄송한 일이겠지만 저는 감히 선생님을 존경하며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부족함을 노력하며 작은 걸음으로나마 쫒아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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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2007.01.13 01:01:37 *.230.174.166

사부님 안타까움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 ...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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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瀞
2007.01.13 01:52:26 *.142.240.217
웬지 모르게 울컥하고 고개가 숙여집니다만...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나에게 빛과 길이 되고 영감을 주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일생의 큰 행운일 것입니다.
제가 여태 산 삶은 길지 않으나, 그동안 훌륭한 많은 분들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참된 스승과 같은 분을 품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요새는 이상하게 작은 일에도 웃음과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존경하고 흠모하고 빛과 길이 되는, 그래서 저절로 평생 품을 수 밖에 없는 스승을 가슴으로 맞이하고 느끼고 싶습니다. 머지 않아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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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7.01.13 21:58:52 *.230.199.144
내 마음 속의 달빛같은 선생님... 그 선생님의 스승님이 떠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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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1.14 14:03:25 *.218.202.22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로 우리는 선배들의 짐을 나르고 있군요.
사부님의 향기가 길현모 선생님으로부터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에게 그 향기를 다시 전해주고 계시는 모습을, 저는 왠지 길현모 선생님께서 하늘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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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1.18 15:09:56 *.240.191.244
삼가 길현모스승님의 명복을 빕니다.
예전에 이글읽고 참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런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될 수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스승을 닮은 스승님이 계셔서 좋아요.
저높은 곳에서 잘 지켜보시고서 만족해 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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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래오
2007.01.19 07:22:09 *.53.223.3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 부러움과 존경을 보냅니다.
가셨어도 영원히 이어지는 좋은 만남이 될거라 믿습니다.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니어도 항상 여운으로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기에 더욱 영원하겠지요.
받은 사랑과 가르침을 모든 이에게 나눔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겠지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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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09 년 5기 연구원 모집공고 [28] 부지깽이 2009.01.04 13715
55 9 월 27일 청량산 시축제에 오세요 [45] 부지깽이 2008.09.09 13723
54 [단군의 후예 9기 모집] 하루 2시간의 자기혁신 file [59] [32] 승완 2012.12.12 13775
53 오병곤, 홍승완 연구원이 함께 쓴 책이 출간됐습니다! file [26] 관리자 2008.11.26 13856
52 신간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출간! file [43] [1] 승완 2012.08.14 14080
51 4기 연구원이 1 년간 만나게 될 강사진 [12] 구본형 2008.03.16 14206
50 변화경영연구소 제 4기 연구원 최종합격자 발표 [32] 구본형 2008.03.25 14243
49 변화경영연구소 4기 연구원 모집 [13] 구본형 2008.01.03 14246
48 2기 연구원인 강미영 님의 첫 책이 출간됐습니다! file [75] 관리자 2008.11.18 14895
47 마음이 원하는 것을 삶과 일상의 중심으로 끌어 들인다 [2] 구본형 2005.03.29 15036
46 '나의 필살기를 창조하는 법' 프로젝트 참여자 모집 [32] 부지깽이 2009.09.16 15053
45 [공지] 신종윤 연구원이 번역한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 [112] 승완 2010.01.22 15186
44 ★축★ 정경빈 연구원 첫 책 : 서른, 내 꽃으로 피어라 file [42] 박승오 2009.06.03 1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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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 [1] [8] 구본형 2004.10.16 1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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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필살기' 저자 강연회 알림 file [20] 관리자 2010.04.05 16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