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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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19시 08분 등록
1. 내가 알고 있는 세계사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 하나를 묘사할 것

히말라야(Himalaya).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던 산맥. 해발 8,000m급 최고봉 14좌가 있는 곳.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居處)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4좌 중의 왕좌 즉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은 초물룽마. 초몰룽마는 ‘대지의 여신’이라는 의미. 이 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1856년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정복을 위한 측량 사업을 하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땅 초몰룽마를 발견한다. 이 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영국의 측량사업 국장 조지 에베레스트. 그래서 초몰룽마는 원래의 본명을 잃어버리고, 에베레스트라는 낯설은 이름을 갖게 된다.

영국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것. 그것이 영국이 에베레스트에 올라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라고 오만함을 드러낸다. 이후 영국은 수없는 등반대원을 에베레스트로 보냈다. 1차 세계대전 전후 7차례 등정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귀결되었다. 흰 눈으로 위장된 빙하절벽은 곳곳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예측불가능한 산사태와 끊없는 산소부족은 등반대원을 괴롭혔다. 등반대원의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에베레스트는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국은 당황했으며, 등반대원은 두려움에 떨었다.

영국과 등반대원들은 자신의 생명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15kg가 넘는 산소통을 운반할 사람이 필요했으며, 식량과 짐을 날라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셰르파’이다. 셰르파는 티베트의 고산 소수민족이었다. 그들은 짐승 대신 무거운 짐을 들었으며,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들은 목숨값으로 무려 하루에 1루피(25원)의 대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들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미개한 종족일 뿐이었다.

1953년 4월 26일 영국은 대규모 원정대를 에베레스트에 보낸다. 영국등반대는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보여주기 위해 정복자는 반드시 영국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등반대 중에는 식민지 뉴질랜드 출신의 등반가가 한 명 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러.

영국등반대와 함께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359명의 셰르파. 그 셰르파 중에 정상을 꿈꾸는 한 명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텐징 노르가이’. 그는 아내가 떠준 두툼한 양말을 신고 있었으며, 딸이 건넨 색연필을 수호신 삼아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텐징 노르가이는 묵묵히 에드먼드 힐러리의 뒤를 따랐다. 영국의 등반대원의 목숨을 원하는 크레바스는 죽음의 발톱을 곳곳에 숨기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힐러리는 그만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다. 그때 힐러리를 지켜주던 단 하나의 밧줄이 있었다. 그 밧줄의 움켜쥐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텐징 노르가이였다. 힐러리가 크레바스에 빠지는 바람에 텐징도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자일을 끊어버린다면 텐징은 살 수 있었다. 텐징에게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수없이 죽어갔던 이름없는 셰르파들.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자신들. 그러나 텐징은 자일을 놓지 않았다. 결국 텐징은 힐러리의 목숨을 구했다. 이들은 서로 이방인이었지만, 이 순간 ‘하나’가 된다.

1953년 최종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사람은 힐러리와 텐징이었다. 그러나 정상 선발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영국원정대 존 헌트 대령은 1차 정상 공격조로 영국인 2명을 선발한다. 정상을 밟는 사람은 영국인이어야 했다. 두 이방인, 힐러리와 텐징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6시간 후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1차 공격조는 결국 실패했다. 캠프는 삽시간에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힐리러가 떨리는 목소리로 헌트 대령에게 부탁한다. “대장, 제가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텐징과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당시 영국 등반대는 영국 여왕 대관식 전에 반드시 정상정복의 임무를 부여받은 급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힐러리와 텐징은 2차 공격조로 선발된다.

5월 29일 새벽 6시 30분. 살을 에는 눈바람, 숨을 먹어오는 호흡, 눈안개에 사라져버린 정상. 그러나 힐러리는 조금씩 쳐지기 시작한다. 그의 시야에서 텐징은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만 갔다. 힐러리는 생각한다. “텐징은 이미 정상에 올랐겠군. 그럴 시간이야. 충분히 그럴 시간이지.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러나 힐러리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정상에 몇 발자국을 남겨 놓은 그 순간. “친구 어서 오게나, 30분이나 기다렸네.” 텐징은 정상을 몇발자국 남기고 힐러리를 기다렸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서로 그저 눈빛을 나누었다. “자네가 앞서 왔으니, 첫발자국은 자네 몫이네. 자네가 먼저 올라가게. 텐징” “힐러리, 나는 셰르파족이야. 우리에게 정상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어. 이 모든 봉우리가 다 정상이지. 먼저 올라가게. 난 언제라도 다시 이곳을 올 수 있지만, 자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순간일 수 있다네.” 텐징은 힐러리를 밀어 올리듯이 정상을 밟게 한다.

역사상 에베레스트를 밟은 최초의 사람은 에드먼트 힐러리였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정상에 선 힐러리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텐징 노르가이 사진만이 있을 뿐이다. 힐러리는 자신을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고, 오직 텐징의 사진만을 남겼다.소중한 가치들이 잊혀져 가는 지금, 이 두 사람의 우정과 배려을 기억한다……

* 텐징과 힐러리의 이야기는 <지식채널e> 초몰룽마의 두 이방인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2. 내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이 이루어 졌던 장면에 대하여 묘사할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사춘기 시절의 열병과 방황의 경험들은 가지고 있다. 담배, 술, 당구 그리고 이성친구를 알게 된 시기가 고등학교 1학년. 언제나 그렇지만 ‘일탈’의 경험은 긴장에 대한 해방을 맛보게 한다. 숨막히는 입시경쟁은 ‘일탈’에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 대학입학 실패와 재수. 그리고 운좋게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갔다 해도 나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특별한 목적도, 꿈도 없었다.

꿈이 없었던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음악과 바둑써클을 들어가기 위해 학생회관을 어슬렁 어슬렁 배회했다. 그런데 나는 우연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던 학과 선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그 선배가 속한 사회과학 서클 가입원서에 싸인을 한다. 그 당시 그 서클의 정체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한다. 과거에 내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은 약관의 젋은이에게 충분히 파괴적이었다. 그 당시 사회과학 써클은 학생운동의 핵심포스트였으며, 양질의 활동가를 배출하는 자궁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

내게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하게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지금의 ‘아내’이다. 그는 서클의 선배였으며, 히말라야 산맥의 길잡이였다. 그는 정확히 ‘텐징’의 역할을 해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커다란 이익도 바라지 않고 말이다. 나는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다니듯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에게서 투쟁가를 배웠고, 민중가요의 서글픔을 느꼈다.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을 쉽게 풀이해 주었다. 멋모르는 풋내기가 세상에 눈을 뜨는 데, 말없는 동반자가 되어 준 것이다. 지면을 통해,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에와서 회상하건대, 내 인생의 산맥을 등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바로 ‘아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왜 나에게 학생운동의 경험이 충격적이었는지는 내 자신의 유년시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살던 곳은 우리나라를 이끄는 훌륭한(?) 왕을 두 번이나 배출한 명당(?) ; ‘연희동’이었다. ‘연희동’이라는 동네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는 곳이 연희동이라고 하면 ‘우~와’하면서 탄성을 지르곤 한다. 내가 사는 곳은 ‘부유한 사람들의 동네’로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희동은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면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받고, 하루하루 밥벌이 문제에 직면한 가장 하층의 서민들이 사는 야누스적인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1시간 정도를 걸어갔어야 하는 데, 항상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 길이 지름길이었다. 그 당시 어린 아이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는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통학길에는 불량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 근처에는 50미터마다 실탄과 권총을 소지한 사복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 마음속에 전두환 대통령은 불량배 없는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내 뇌리속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기존의 군부집권 세력에 상당한 호감과 긍정의 젋은이에게 대학 입학 이후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공부는 나약했던 한 젋은이를 거리를 걷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대학 1학년 시절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비디오를 보면서 느꼈던 소름끼치는 ‘전율’과 ‘공포’는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많은 갈등을 겪었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회과학, 철학, 정치경제학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탁상공론에 그치는 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 많은 활동들을 하였다. 노동자 파업, 철거민투쟁, 반핵운동, 농민운동 등 가지지 못한 자들이 투쟁하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참여했었다. 대학에서는 새로운 활동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세미나와 학생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석양이 밀려오는 저녁이 되면, 뜻을 함께 하는 선배와 후배들과 밤새 영원한 인간해방과 노동해방을 위한 ‘혁명의 진혼곡’에 대해 토론하면서 술잔을 밤새 나눴다. 그렇게 내 대학생활을 채워져 나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으며, 세상을 구원하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모든 행동과 사고가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공부하고 학습했던 사상적 무기들이 ‘진리’(眞理)임을 확신했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경험은 소중하다. 그 결과가 상관없이.

아무 생각도, 아무 꿈도 없는 젋은이에게 치기어린 모습이었을지언정 한마리의 애벌레가 고치를 거쳐 한 마리의 나비가 잉태되는 과정이 그 자신을 성숙시키듯이 내 짧은 인생에 너무나 중요한 변태의 과정이었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평범한 운동권(?) 시절이었을지 모르지만, 이 시간은 내게 자기혁명의 과정이었다. 내성적이며, 소심한 그리고 목적도 꿈도 없는 젊은이에게도 ‘자존감’(自存感)이라는 것을 찾아준 도약의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상아탑의 보호막을 벗어나 졸업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학점은 바닥이었으며, 남들 다한다는 그 흔한 토익점수 하나 없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나는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을 구해야 했다. 막막했다. 대책이 없었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그 치열했던 ‘열정’에 비해, 자신을 위한 준비는 너무도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눅들지 않았다. 뭐하나 제대로 된 것 하나 없지만, 내면 속에는 막연한 자신감(自信感)이 살아 움직였다. 다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돌파구’였다.

그 고민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히 다음과 같은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다.
<조선일보와 SK그룹 공동주최 대학생 논문공모전>
논문 1위 500만 장학금 + 미국 명문대 탐방 + 입사시 특전
그 당시 개최되었던 가장 큰 대학생 논문공모전이었으며, 수상에 대한 혜택 또한 파격적이었다. 기간은 두 달여 밖에 없었다. 한 편의 논문을 작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목표’는 뚜렸했다. 대학생 논문 공모전 당선.
남은 두 달을 사회과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전쟁 같은 자료수집과 글쓰기 작업을 수해하였다. 논문 제출 마감 3일 전부터는 편집과 교정을 거의 한 잠도 자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태어나서 공부를 위해 밤을 새워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논문 마감일 날 논문을 제출하였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연락이 왔다. ‘논문 공모전 1위 당선 되셨습니다.’ 1위는 예상 밖이었다. 내 인생의 첫번째 성공의 경험.

대학 졸업 후 돌연 세일즈 분야에 입문하게 된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지금도 후배들은 내가 연구소와 같은 곳에서 근무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 1997년 - 한국얀센 입사, 상위 5%(A+그룹) Achievement Award를 수상.

이후 2000년 4월.
생명보험 업계 입문. 성공하기 위해서는 ‘확신범’이 되야 했다. 가치와 의미를 뼈 속 깊숙이 각인시키는 ‘새빨간 확신범’ 말이다 시간은 흡사 영화 ‘300’의 스파르타 군인과 같은 전쟁 같은 시기를 보냈다.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 365일 단 하루를 쉬워본 적이 없었다. 아침 7시 출근, 밤 12시 이후 퇴근. 집은 잠자는 곳이었으며,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이었다.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었으며, 쉬는 것이 일하는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생명보험 판매에 모든 승부를 건 ‘몰입’(flow)이었으며, 솔직히 ‘일중독’(work-holic)이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인정받는 높은 성과와 실적을 보였다.
* 2000~2008년 현재 : Prudential 입사. 매년 MDRT(COT), 상위 5% 안에 들어가는 순위. 연봉 0억, 최연소 부지점장. 최연소 지점장…2008년 쓰디쓴 실패의 경험.

내 인생이 도약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 시기가 반드시 내 인생의 도약의 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시기를 언급하는 것은 ‘목표’(goal)를 위해 가장 치열하게 전진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를 통해 많은 것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웃음, 아내와의 시간, 가족간의 평화로움과 같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들 말이다.

세일즈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제보다 성장한 나”라는 문구였다. 모든 것을 ‘배움’의 자세로 임했던 것 같다. 가망고객 개발을 배우고, 전화하는 법을 배우고, 상담기법을 배우고, 프리젠테이션을 배웠다. 배우고, 또 배웠다. 도약이 이루어진 다음 새로운 차원을 위한 요소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인생은 배움과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날이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난 오늘도 배운다.

3. 도약이 이루어 진 다음 그것은 지속되었나 ? 아니면 중단 되었나 ? 도약이 이루어 진 다음에 새로운 차원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

* 이 부분은 정확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다시금 정리해서 추후의 과제로 넘기고 싶다. 깊은 고민을 통해 도약을 장악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과거에는 도약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자빠진 상태에 있기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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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16 19:12:19 *.244.220.254

1편에서 에드먼트 힐러리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텐징 노르가이라는 셰르파(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편은 조력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저는 1편과 2편의 질문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기 홍승완 연구원의 조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승완아~ 고맙다! 네 까칠한 첫인상, 모두 용서해줄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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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6.18 09:23:25 *.247.80.52
어이~ 친구, 전달력이 좋네.

언제 한번 이야기 보따리 풀어놓으라고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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