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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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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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7일 05시 53분 등록

6월 오프모임 자료


1) 내가 알고 있는 세계사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 하나를 묘사할 것

<히틀러와 유태인 학살 사건>

1. 선정배경
가. 전쟁으로 인한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
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
다. 사람의 목숨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 →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었던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
라. 대표적 학살의 주인공 : 히틀러

2. 히틀러
히틀러(1889년-1945년). 백범 김구(1876년-1949년)와 같은 세대를 산 인물. 같은 해에 태어난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김좌진(1889년-1930년), 세계 무성영화계에 한획을 그은 찰리 채플린(1889년-1977년) 모두 동시대 인물.

3. 히틀러는 왜 600만명이나 되는 유태인을 학살했을까?
가. 당시의 반유태주의 풍조 - 독일 뿐 아니라 전 유럽에 팽배. 오히려 독일은 약했던 편
1) 종교적 대립 : 기독교와 유태교
- 유태인들만이 신자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
- 그리스도를 여러 예언자 중의 하나로만 인정.
- 예수를 죽이라고 로마 총독을 부추기고 요구한 것은 바로 유태인들
2) 유태인들의 민족주의
- 폐쇄적 생활태도(지독한 민족주의 유지) ex)게토 - 유태인 부락
- 탈무드를 생활화 한 민족 제일주의 → 타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다
3) 전 세계 주요 요직 장악, 돈에 대한 가치관
- 고리금융업부터 시작(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중 '샤일록') 차후 금융업의 발전을 이루며
상업(경제권)을 장악
- 신흥 귀족으로 성장
- 법조계, 정치계, 금융계, 기업 등 주요 요직을 다 차지.

나. 히틀러의 정책
1) 독일노동자당(일명 나치스) 창립 당시부터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모토로 삼음
→ 어렸을 때 역사 선생으로부터 반유태주의 사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글쎄..
그리고 어머니가 유태인의 정부? 글쎄..
2) 1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가 정책의 중심에 삼은 것은 치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하는
경제적 자립을 국민들에게 요구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으며, 대중집회에서 그의 뛰어난 웅변실력은 히틀러가 정권을 이끌어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음

3)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며 반유태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유태인들을 격리. 처음에는 격리만 하려 했으나 연합군을 이용하려는 유태인들의 정치공작에 대응하여 학살(홀로코스트)을 시작.

다. 히틀러의 사상
1) 극우주의자, 민족주의자, 인종주의자
→ 세계관 : 그는 세계사를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인종들 사이의 끝없는 생물학적 투쟁으로 파악
2) 우생학을 신봉, 우생정책을 폄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인종주의적 사고를 전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체임벌린(H.S.Chamberlain)이다. 그는 영국 출신이나 독일로 귀화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로 나중에 오페라 극작가로 강한 인종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리햐르트 바그너의 사위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체임벌린은 인종의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이므로 인종적인 혼혈을 피하고 우월한 인간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문명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피가 섞여지면 그 창조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인종인 아리아족이 갖고 있는 피의 순수성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켜져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 군인다운 정신과 창조적인 힘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 혈통에 대한 체임벌린의 이런 맹목적 집착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국가나 민족내의 다른 인종, 또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행위를 공공연히 부추기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안에서라도 정신적, 유전적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인위적 제거를 주장하는 우생학(eugenics)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점점 극단화하며 그 사악성도 점차 노골화한다.

라. 결론
사람의 생명은 시대의 사상 또는 전쟁의 발발 여부에 따라 그 존엄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고는 한다. 우리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또는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나라면, 나 또한 그렇게 나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나의 사상에 더 중요한 사항이었을까? 흘러온 역사 속에 그들의 죽음은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은 것일까? 또한 히틀러의 학살에 의해 죽은 그 많은 유태인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 이었을까? 역사와 사상과 죽음... 무엇이 옯바른 죽음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우린 역사를 보면서 그들의 죽음을 다시한번 되새기고 그들의 사상, 가치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 내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이 이루어 졌던 장면에 대하여 묘사할 것

<2002.4.9 ~ 4.12(3박 4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교육 마지막 시간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다. 편지를 통해 그동안 잘못해왔던 점을 진심으로 사죄하였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아내는 그 편지를 믿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결혼 7년간의 기간 동안 내가 잘못해 왔던 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혼전부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즉, 아내에게 해주는 것은 형식적이며 내 기분에 좌우되어서만 실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회사에서는 외면적으로 잘 보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꽤나 괜찮은 사람(외모의 덕 톡톡히 받음)으로 보여졌었다. 하지만 집에만 오면 차가운 사람, 이기적인 사람,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 개인의 영역에서만 살려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변화하려 노력하였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내가 변하면 세상이 달라보인다’로 바꾸려 노력하였다. 타인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자 여유가 생겼고, 여유가 생기면서 책을 접할 수 있었으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책을 통해 세상의 무한한 지식을 받아들였으며, 감동받았고, 인생 선배들의 경험을 읽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용기와 자신감, 열정을 얻었으며, 매사에 진지하고 집중하게 되었다.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가졌으며, 회사에서 자기계발에 대해 인정받게 되었다.

자기 계발에 대한 노력은 나의 칼럼 '출근시간 변천사'에 소개해 놓았기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그 당시 읽었던 책 중에 한권이 기억난다. 바로 사부님이 쓰신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당시 나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이 책을 접하였을 때 비로소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고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는 큰 변화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 정말 큰 변화다.



3) 도약이 이루어 진 다음 그것은 지속되었나 ? 아니면 중단 되었나 ? 도약이 이루어 진 다음에 새로운 차원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요소는 무엇일까 ?

변화는 현재도 계속 유지중이다. 끝없는 변화를 모색 중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짓하다 죽을 것 같다. 도약이라기 보다는 변화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하다. 현재는 도약을 하기위한 발판을 마련 중인 셈이다.

나의 도약은 책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확실히 안 것은 더 이상 나는 조직생활에 잘 맞지 않고 내 인생 마지막까지 조직과 같이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인생 후반부를 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한 그 첫 번째 일이 바로 나의 책 한권이 될 것이며 이 책을 통해 나는 한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고 그를 발판으로 다시 새로운 도약을 해 나갈 것이다.

도약을 위해 지금과 같은 습관(새벽별 보기 운동, 책읽기 운동, 글쓰기 운동)을 나의 뱃살이 아닌 근육 깊은 곳에 박아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내가 할 도약에 대해 잊지 않고 머리에 각인시킨 채 살아야 할 것이다. 절실하고 처절하게 나를 돌아보고 채찍질하고 밀며 계속해서 전진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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