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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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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3일 09시 25분 등록
내가 알고 있는 세계사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 하나를 묘사할 것

베트남전쟁

흔히 베트남전이라고 불리는 전쟁에 대한 정의를 해볼까 합니다.
- 제1차 베트남-프랑스 전쟁 : 1946∼1954년 :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북 베트남이 독립의 쟁취를 위해 프랑스와 치룬 전쟁
- 제2차 베트남-미국 전쟁 : 1960∼1975년 : 미국의 비호를 받는 남 베트남(자유진영) 과 치른 제2차 베트남-미국 전쟁
이렇게 베트남 전쟁은 2가지 정도로 구분이 됩니다. 제2차 전쟁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이 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지만 대체로 베트남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그 중 우리나라가 참전한 2차 베트남-미국 전쟁에 대해 좀더 알아보도록 할께요.

1961년 미국이 J.F케네디 대통령은 남 베트남의 공산화는 동아시아의 공산화를 초래한다는 우려 때문에 남 베트남에 미 정규군을 파병함으로써 군사적 원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러하였지만 아마도 그 이후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였겠지요) 그러다가 미국 17대 대통령 존슨 정부는 미군을 직접 전투에 참가시키게 되었고 1965년 북 폭을 시작하게 되면서 전쟁은 본격화 되었습니다.

이때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25개국에 참전 요청. 7개국이 참전하게 됩니다.
한국은 1964년 7월 18일 비전투부대인 의료 지원단과 태권도교관단 파병을 시작으로 점차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와 맹호 사단, 백마 사단등의 지원부대를 파병하습니다.

우리 나라는 철수하던 1973년 3월 23일 까지 총 8년 8개월간 32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5000여명의 전사자와 16000여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우리 국군이 파월 하게 된 동기와 명분은 여러 가지가 설명이 되겠지만
1) 정치적으로는 자유 베트남이 공산화 되는 것을 막고 자유를 수호하려는 공동 방위체로써의 신의를 준수함은 물론 우리나라가 공산화의 위기에 처했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참전 16개국에 대한 보답일 뿐 아니라 국제적인 지위 향상에도 일조했습니다.

2) 경제적으로는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겠습니다.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 상태는 세계 최하위 빈곤 국가로서 기업의 해외 진출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군 파병을 계기로 파병 기간 중 약10억 달러란 당시로서는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 극도의 외화부족을 면했으며 /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 대열에 끌어올릴 수 있었고 / 한편 군사적으로는 방위산업 육성과 장비 근대화를 이루었고 / 우리 군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 : (국가별 전투 수당 지급 금액 비교표) 중위 기준 : 미국 $485 / 필리핀 $454 / 태국 $395 / 한국 $155? (사병 월$43∼56 지급 받았음) .월급은 모두 다 받지 못한 것이죠.

제가 이 베트남전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하나는, 제가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특히 제일 많은 영화에서 만난게 이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베트남전쟁 영화들은 재미는 물론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게 하였죠. 특히 세계4대 베트남전쟁 영화로 꼽히는 것들은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 큐브릭 감독(제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의 풀 메탈 자켓 / 드팔마 감독의 전쟁의 사상자들 / 올리버 스톤(직접 참전)의 <플래툰-미국의 영웅주의를 배제한 비판적인 시각의 영화>이 있는데 이렇게 영화를 통해 베트남전을 만나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 집안과의 관련입니다.
아시다시피 2차 베트남 전쟁 때인 베트남-미국 전쟁 때 미국 UN의 지원을 위한 한국 파병 요청으로 저희 큰 아버지 두분, 아버지까지 세분이 참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큰아버지들은 대학교에서 수의학등을 전공하셔서 의료 파병등이었으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68-69년 해병대, 청룡부대 소속으로 밀림의 전장을 직접 누비며, 옆에서 동료가 폭탄에 의해 갈갈이 찢어져는 죽어가는 모습들을 수도 없이 보셨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갈기갈기 찢겨진 동료의 시체들을 그 자리에서 주워모으고 동료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일 내가 이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라는 감정이 교차하면서 얼마나 괴롭고 또 괴로웠을지 어린 마음에도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마음이 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작전에 나가기 전에 서로에게 이따 저녁에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 무사하라며 마지막 인사 아닌 인사를 매번 나누었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허리에 부비트랩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게릴라들이 설치한 폭탄 파편 자국이 허리에 남아있기도 하십니다. 다행히 허리에 총탄을 매고 있어서 약간만 다쳤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결국 매일매일 삼형제를 월남전에 보내놓고 하루도 맘편히 잠자리에 드시지 못하셨던, 할머니께서 매일 새벽 목욕재계를 하시고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들의 무사 귀환을 빌고 또 비셨기에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자라오면서 접해온 우리 가족의 베트남전에 얽힌 이 이야기들은 세계에서 일어난 그 어떤 전쟁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나 돈 때문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그러한 전장을 선택하셨다는 것. 전쟁의 주최인 베트남 난민들을 보면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표현한 전쟁 앞에 죽음이 갖는 개별성이라는 표현이 와닿습니다.


내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도약이 이루어 졌던 장면에 대하여 묘사할 것

현재 회사를 들어오기 전에 저의 첫 직장이기도 한 오케이캐쉬백서비스라는 회사를 다녔었습니다.
전 캐쉬백 포인트를 공연과 묶어 공연 예매 시 포인트를 적립해 주고 또 포인트로 공연을 구매해 볼 수 있는 사업 모델을 팀 과장님과 만들어 가는 역할들을 했습니다.

제가 영화를 좋아했기에 자연스럽게 관심분야의 일을 더욱 진행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나름 만족하기도 하고, 직장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또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하던 직장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의견에 대해서는 스스럼 없이 이야기 하는 타입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직장 상사는 의견을 태클로 받아들이며, 지시를 하면 일체의 질문 없이 시키는 대로 하길 원하는 타입이셨습니다. 본인의 논리에 의해서만 일하길 원했고, 아랫 사람은 얌전히 따라주기만을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만큼 의견을 펼치고 제시해야 하는 게 제가 진정한 기획자로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상사의 취향에 저를 맞추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사의 취향에 저를 맞추지 않았다고 결코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얼핏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기억에 대략 ‘말이 많다’는 의견이었는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사랑과 열정,성실을 바쳐 일하는 곳에서 받는 평가란 고작 저런 것이구나 하는 심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고작 ‘말이 많다’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싶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야근 후 퇴근한 늦은 시각이었지만 집에 와서 분노에 찬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쓰면서도 눈물로 앞을 가려 자주 눈물을 닦아내야 했습니다.

그날 저는 결심했습니다. 이 직장을 떠나겠다고. 더더욱 멋진 직장으로 보란 듯이 떠나겠다고. 당시 유치한 생각이지만 여기 보다 더 좋은, 더욱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직장으로 보란 듯이 사표를 던지며 떠나겠다.
입 다물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 일이나 하는 그렇고 그런 직장인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의 철학을 가지고 멋지게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실 대학교 때까지는 ‘의지박약아’라 작심삼일 형인데, 그 이후로는 제가 눈에 띄게 달라지더군요. 다음날 아침부터 2년 전 손뗀 토익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 대해서 더욱 알기 위해 새벽부터 자료 정리, 스크랩등을 해나갔습니다. 그렇게 다른 회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노력을 하늘이 알아줬던 것일까요? 이전에 다른 팀에서 하는 업무를 TF형식으로 차출되어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 쪽 팀장님께서 팀을 옮겨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그 뒤 팀을 옮기고 저는 여전히 저만의 스타일대로 다양한 의견을 드리고 팀장님과 돈독히 관계를 쌓아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마음 편히 회사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결심한 더 좋은 회사로, 더 멋지게 떠나기 위해 계속 준비했고 8개월 뒤에는 현재 직장으로 팀장님께 아쉬움을 남겨 드리며 떠났습니다.

도약이 이루어 진 다음 그것은 지속되었나 ? 아니면 중단 되었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그때 직장을 옮기게 된 것을 도약이라고 해야할지..
최후의 도약은 아니고 중간 도약 정도는 충분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회사 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고 저의 철학을 가지고 일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더더욱 굳건해 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시적인 1단계 이직이라는 도약 후에 다시 한번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의 저를 돌아보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더욱 커졌거든요. 내가 바라는 정신적인 가치의 삶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그러한 또 다른 보다 큰 관점의 화두는 나이나 기타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내가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최후의 도약을 위한 저의 중간 단계들의 도약은 계속 만들어 질 것이고 만들어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차원을 유지하기 위해 2단계 도약은 아마 변경연에 연구원으로 선뜻 지원한 것이기도 하겠지요.

이 최종의 도약을 위해 계속 새로운 도약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할 요소는 저만의 철학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대략적인 저의 철학이 완벽해 질 수 있도록 더욱 정신적인 게발을 해나가고 그 철학 속에서 나만의 스타일로 살아간다면 최종의 만족스러운 도약의 삶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IP *.3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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