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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6일 12시 15분 등록
 

들이대기


  내기는 보통 거는 쪽이 유리하다. 특히 답을 알고 있는 경우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하면 십중팔구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결과가 뻔한 내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승진이의 심리를 역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원 이야기를 했을 때 승진이가 어떻게 반응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취업의 가장 큰 목표중 하나인 월급이 언제 나올지 분명치 않은 회사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똑 부러지는 것을 좋아하는 승진이 성격상 이 말이 나옴과 동시에 더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월급 이야기를 언제 꺼내느냐다. 일에 관해서는  빽이나 나나 전혀 모르는 것은 똑 같으니 같이 맨땅에 헤딩하면 된다. 이건 딱 우리 스타일이다.


  점심을 먹고 와우교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승진이의 넉살이라면 처음 접하는 환경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함께 들어온 일곱 명의 반 아이들 중 한명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내기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다. 빨리 와서."

  "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전화가 없으신 걸 보면 곧 오시겠지. 친구랑 같이 왔구나.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백승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빽은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녀석은 나를 힐끔 처다 보았다. 저 표정이 속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좋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싫지는 안아 보였다.


  "홍! 이게 니 컴퓨터냐."

  "응. SUN386. 이런 거 처음보지. 모니터도 칼라야."

  "만져 봐도 되냐."

  "그거야 괜찮지만, 너 할 줄 아는 건 있냐."

  "아니. 없어. 신기하다. 모니터가 정말 칼라네."

  "자판 옆에 있는 거 있잖아. 그게 디지타이저라는 거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어."

  "근데 너 이거 할 줄 알어. 언제 이런 걸 다 알고 있었냐."

  승진인 처음보고는 고성능 컴퓨터 시스템을 보고는 마냥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다.

  "나도 몰라. 아직 못해봤어."

  "여기서 일 하려면 이런 거 할 줄 알아야 되잖아."

  "당연하지."

  "근데 넌 못하잖아."

  아. 이 녀석의 무대뽀 질문이 또 시작되었다. 나도 그래서 답답하단 말이다.


  "현웅아.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무슨 부탁인지는 모르겠는데 너 내 소원먼저 들어줘야 될 꺼다. 내기는 내기니까."

  이쯤 되면 승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가 되었다. 좁지 않은 사무실에 빈자리가 몇 개 보인다는 걸 봤기 때문이다. 마땅히 할 것이 없어진 빽의 상황에서 여기 좋은 놀이터가 될 것이다.


  "사장님. 언제 오시냐."

  "나도 몰라. 경리누나 말 들었잖아. 곧 오실 꺼야."

  "현웅아. 사장님 오시면 나 여기서 일하게 해달라고 이야기 좀 해주라."

  "글쎄다. 이야기야 해보겠지만. 컴퓨터 깡통은 나 하나라도 벅차실 텐데.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겠다. 알았어. 아무튼 이야기는 해볼게. 소원하나 추가다."


  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배가 아팠다.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밖으로 나와서 배를 움켜잡았다. 이제 두 가지 소원을 어떤 것으로 정할 지 고민하면 된다. 일이 잘 풀리려는 건지 느낌이 좋다. 문제는 월급이 나오지 않는 다는 말을 듣고 빽이 어떻게 나올지 그게 문제다. 화장실을 나왔다. 꼬일 때는 한없이 꼬이다가도 어느 순간 풀리기 시작하면 주체 못할 정도까지 꼬부랑 길이 고속도로가 되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1층에서 걸어오는 사장님 머리가 보였다. 


  "나오셨어요. 사장님."

  "어. 그래. 점심은."

  "네. 먹었습니다. 친구랑 같이요."

  "친구."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친구요."

  "벌써 왔냐."

  "헤헤헤. 우리가 좀 빨라요. 사장님."

  "상황을 이야기 해줬는데도 왔어. 허. 그놈도 참 이상한 놈 일세."

  "아뇨.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함 놀러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알았다. 들어가자."


  "안녕하세요. 백승진이라고 합니다."

  빽의 넉살은 알아줘야 한다. 아무리 처음 가는 자리라도 이 녀석은 전혀 낯설어 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방 친해진다. 정말 부럽다. 


  "어. 그래. 반가워. 백승진이라고. 이름이 참 멋지구나. 원 없이 승진하겠어."

  평소 별로 웃지 않던 경리누나까지 다 웃었다. 나도 회사에서 승진할 수 있을까?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하고 싶다고."

  "네."

  삑은 좀 당황하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컴퓨터를 해본 적 있나."

  "아뇨. 오늘 처음 보는데요."

  "여긴 컴퓨터를 이용해서 도면을 그려야 하는데 컴퓨터를 모르고는 할 수 없어."

  사장님은 빽과 나에게 번갈아 눈길을 보냈다.

  "컴퓨터야. 처음일 수 있으니까. 뭐 괜찮아."

  순간  빽의 안도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공고 졸업반이니까. 제도 자격증은 있겠지."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장님도 그것을 알아본 것일까?

  "없습니다."

  사장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거 3학년 되면 다 따는 거 아닌가. 그럼 공부는 몇 등이나 했어."

  승진이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나 이 녀석이나 공부와 자격증 이야기만 나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냥. 중간정도."

  "허. 이거 보게. 컴퓨터도 몰라. 자격증도 없어. 공부도 그저 그래. 내가 자넬 뭘 보고 뽑아야 하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쓰던 작전을 미리 말해줄 껄 그랬다. 그냥 이 녀석 스타일대로 들이대면 될 텐데. 승진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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