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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06시 48분 등록

 

세무사란 직업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오래된 직업이 아니다. 세무행정을 원활히 하고 납세의무를 정착시키기 위해 61년 세무사법이 제정되면서 세무사란 직업이 처음 생겼다. 최초 10명 정도로 시작하여 현재는 약 8천 명에 가까운 세무사가 활동 중이다. 비교적 소득 수준이 높은 직업이어서 경쟁이 꽤 치열하다. 최종 시험에 합격하는 자가 매년 7백여 명에 이른다. 세무사의 자격은 세무사자격시험에 합격한 자, 관세를 제외한 국세 관련 행정사무 종사 경력이 10년 이상인 자로서 5년 이상의 기간 동안 5급 이상 공무원으로 재직한 자, 공인회계사나 변호사의 자격이 있는 자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세무사는 구체적으로 조세에 관한 신고·신청·청구 등의 대리, 세무조정계산서를 비롯한 세무관련 서류의 작성, 조세 관련 신고를 위한 기장(記帳) 업무 대행, 조세에 관한 상담·자문 등의 직무와 소송을 제외한 각종 부대업무를 수행한다.

 

자격증을 따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3 4개월 걸렸다. 공부하는 동안 그다지 흔들리지는 않았다. 남들은 고시에 준하는 마음 가짐으로 그 기간을 힘겹게 인내하지만 나는 그다지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2년 연애하던 아내와 바로 결혼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대로 세무사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결혼이었다.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가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렸다. 그녀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긴 했지만 그다지 미안하진 않았다.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대학 성적이 엄청나게 우수한 것도 아닌 내가 합격한 것은 순전히 무대포 정신때문이다. 무대포 정신은 어릴 적 노가다를 하며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아버지는 신앙을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삶으로 신앙을 사시는 분이었다. 보리쌀 한 자루를 들고 결혼한 아버지는 오랫동안 가난한 목수였다. 그는 결코 보수를 바라고 일하지 않았다. 무료봉사도 많이 했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무조건 맡은 일을 성심성의껏 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무대포 정신이었다. 견적을 낼 때도 아버지는 지나치게 정직한 견적을 냈다. 일을 시키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무조건 신임했다. 덕분에 아버지 사업은 서서히 성장하였다. 60이 넘은 지금은 종합설비를 하고 있는데, 골라 해야 할 정도로 일감이 많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 모두 대학 교육을 시켰다. 

 

대학 시절의 두가지 멋진 무대포 체험 

나는 93학번이고, 전공은 경영학이다. 졸업은 2001 년에 했다. 군대 갔다 온 2년 반을 빼면 학교 다닌 햇수가 6년이 넘는 셈이다. 학교 다니는 동안 잊지 못할 두 가지 큰 일을 시도했다. 그 일은 무대포 정신을 내 세포 갈피 갈피마다 깊숙이 새겨 넣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대학교 1학년(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다) 때의 경험이다. 그 해 여름 여수에 봉사활동을 가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서서  21명의 체임버 합창단을 조직했다. 봉사활동 이후에도 그 합창단은 해체되지 않고 이어졌다. 오히려 성악 전공 지휘자를 초빙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던 참에 그해 겨울, 전문성악가 그룹과 이웃 합창단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당시 소말리아에 내전이 일어나 국제 구호가 시급했고, 그 콘서트는 구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일을 주도하고 이끈 책임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기획과 홍보까지 모든 일을 담당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경험도 없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일은 그 해 학교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150만원의 순이익을 냈고 그 돈은 국제구호단체를 통해 소말리아에 보내졌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고,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의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두번째로는 군대 다녀와서 학생회 부총학생장을 하면서 행했던 학교 발전을 위한 17대 개선 사업이다. 그것은 3학기에 걸친 중장기 계획이었다. 17대 개선 사업에는 도서관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여러 방안과, 구내 식당 개선, 심지어는 교직원 급여 향상 사업까지 들어있었다. 학교에서조차 해결하지 못한 중요한 개선 사항들이 그곳에는 다 들어있었다. 나는 학교 발전을 위한 17대 개선 사업을 기획하기 위해 엄청난 리서치를 단행했고 학교 총장 이하 보직교수, 해당 간부들을 만나 설득 작전을 펼쳤다. 오로지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일에 나의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추진하던 일들은 나의 임기 동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임기 이후 1년 동안 한꺼번에 10 가지 일들이 이루어졌다. 그 일을 통해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 기반을 다지고 씨를 뿌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되었다. 또한 무엇이든 부딪혀 해결하면 된다는 무대포 교훈도 다시 한 번 얻게 되었다.

 

세무사란 직업을 택한 동기는

고등학교 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달 수학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고, 나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려 애쓰는 착한 장남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배려해 무엇을 크게 갈구하거나 욕심내는 아이가 아니었다한 달 수학 과외도 내게는 과분했다. 말하자면 그 한 달의 과외는 내 인생 최고의 사치였던 셈이다. 그 때 수학 선생님이 돈을 잘 버는 유망 직업으로 세무사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마도 돈을 잘 벌려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하는지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내게 지나가는 말로 알려준 정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세무사란 직업은 선망의 직업으로 내 뇌리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할 때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세무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세무사 시험 준비에 돌입했고, 아무런 갈등 없이 그 시절을 잘 견뎠다. 합격한 후에는 바로 세무사 사무실을 차려 독립했다. 그 때가 2004 10월의 일이고내 나이 31살이었다. 남자 나이 31살은 사실 세무사란 직업이 먹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대포 정신을 발휘해 일 한 결과, 4년 만에 확실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변호사의 수임료가 일회적인데 반해 세무 컨설팅의 가장 큰 매력은 클라이언트와 관계를 한 번 잘 구축하면 지속적으로 수입이 생긴다는 데 있다. 매월 기장 대행 서비스로 조그만 사업장의 경우 10만원-20만원, 조금 큰 사업장의 경우 20-4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고, 1년 결산 시 거래처 별로 3백에서-5, 1천만 정도의 조정료를 다시 받을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거래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안정적인 회사를 꾸려가는 관건이 된다. 출발은 어려워도 일단 200개 정도의 거래처가 생기면 안정적인 수익 기반이 생기는 셈이다. 그 기반을 토대로 재무 컨설팅, 재산 제세, PF(Project Finance), 조세 소송 같은 것으로 좀 더 큰 수익들을 올릴 수가 있다.

 

그렇게 택한 직업이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다. 세무사란 직업이 다른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와야 내 수입이 되기 때문에 아마도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몸에 밴 내게는 다른 직업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일을 했어도 나는 만족스러워했을 것이다. 내게 중요한 건 어떤 특정의 일이라기 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인가를 나는 늘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일할 때 요령을 피지 못한다.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한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떤 일에도 심하게 낙망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초창기엔 힘들었다. 경쟁이 심한 이 바닥의 밥그릇 특성 때문에 나 같이 젊은 사람이 진입한다는 게쉽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에는 세상 배우는 수업료를 톡톡히 내야했다. 그러나 손해가 나는 동안에도 나는 그다지 조급하지 않았다. 내 특유의 무대포 정신으로 여유있게 밀고 나갔다. ‘하면 되겠지, 안되면 다시 하면 되지’. 나는 승부를 빨리 내려고 달려드는 대신 성심을 다해 기반을 다졌다. 열심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세무사로서 다르게 하기

언제나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일에 차별화의 방법이 숨어 있는 법이다. 처음 사업 시작하면서 나는 먼저 기존의 세무사들이 어떻게 서비스를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세무사 사무실은 보통 세무사 한 명에 여직원 5-6명이 일한다. 여직원들은 각자 보통 20-30개 사업장을 맡아 관리한다. 일정 년 수가 지나면 세무사는 보통 매너리즘에 빠져 적극적으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큰 돈 벌 욕심이 없으면 그렇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전혀 없다. 그 점이 세무사가 갈수록 태만해지기 쉬운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공부하고 준비해서 때 맞춰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클라이언트로 하여금 제대로 대비하게 하는 것이 세무사로서는 차별화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르게 접근하면 그 자체로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나는 클라이언트의 일을 내 입장처럼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보통 일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이 때 정직은 기본이다. 수수료, 당연히 공개한다. 그런 탓인지 정 세무사 돈 벌어야지하면서 오히려 수수료를 받을 만큼 받으라고 하는 사장님들이 늘고 있다. 잠시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쓰거나 일을 불투명하게 하는 것, 멀리 보면 절대적인 손해다.

세무사란 직업은 세무회계직을 기본으로 경영 컨설턴팅, 금융, 부동산 등 자산종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경쟁력있는 직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세무사 자격증 하나만으로도 성공을 보장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경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회는 여전히 그 곳에 있다. 지금 내가 대하는 한 사람에게 성심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일의 전부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일을 한다.

 

개업 4년이 된 지금은

고객 한 명을 단골로 만들면 그 고객이 자신이 속한 사업자 모임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또 다른 단골을 만들어준다. 세무 공무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과, 양 측을 잘 중개하여 징검다리를 놓는 일도 내 일 중의 하나다. 그 동안 나는 기획한 일이 성과가 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 편 성과가 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돈이 당장 부족하면 대출을 받아 해결하면 된다. 나에겐 언제나 사람이 중요했다. 나는 일의 결과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다. 작년 연말 양길용 씨의 제안으로 메디컬 매니지먼트의 세무 컨설턴트로 합류했지만 ( http://www.bhgoo.com/zbxe/171789 ) 나는 애초 그 일의 성과 같은 것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 일이 전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어차피 일을 같이 하는 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비전이 같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이루게 될 이익은 언제나 나중 문제다.

 

그 동안 뿌린 씨앗이 자라서 차츰 열매를 맺고 있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거래처가 늘고 있다. 작년부터 수익이 나기 시작한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어려울 때를 별 고민 없이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직원 한 명 데리고 시작한 사업장에 이제는 4명의 여직원이 생겼다. 한 명 한 명 늘어 4명이 된 것이고, 그렇게 들어온 여직원들은 아무도 이직을 하지 않았다. 개업 후 2년이 되자 손익분기점(break even)에 도달했. 그 때부터 직원들에게 모든 걸 매출에서 누락하지 않고 공개했다. 지금까지 온 길보다 갈 길이 멀고, 지금까지 낸 수익보다 앞으로 낼 수익이 훨씬 많을 것이기에 용기를 냈다. 나 역시 공개된 월급만 가져가고 나머지 이익에 대해서는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나누기로 했다. 자신이 한 일이 수익으로 쌓인다는 걸 아는 직원들은 내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더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직원 재교육은 시간 날 때 직접 한다. 개인들에게 필요한 숙제를 내주고, 내 앞에서 설명해보게 한다. 사람은 발표를 통해 더 잘 배운다. 나는 일일이 직원을 간섭하는 일 대신에 동기부여하는 쪽을 택했다. 나 역시 늘 공부하고 있다.

 

10년 후의 꿈

나는 클라이언트들에게 사심 없이 준다. 그 사람이 나의 클라이언트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준다. 그것은 계산된 몸짓이 아니다. 나는 돈은 아니지만 남들에게 무엇인가 주는 걸 좋아한다. 앞으로 나는 사업을 크게 키우고 싶다. 먼저는 내 자신의 수입이 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잉여 자본을 만들어 가치 있는 일에 꼭 쓰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뜻을 같이 하는 목사 친구들이 있다. 의사결정을 할 때 나를 움직이는 내적 가치는 아무래도 그 근본이 신앙에 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합창단 콘서트를 조직해 번 돈을 소말리아에 보냈을 때의 그 기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무 생생해서 생각만해도 그 때의 기쁨이 세포 마디 마디에 다시 살아난다. 기부중독자 김장훈의 행보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느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10년 후 쯤이면 각기 자기 전문 분야를 가진 약 10명 정도의 다양한 세무사들이 내가 세운 세무 법인에 합류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 나는 벌써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고 함께 성장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세울 법인은 현존하는 로펌처럼 회사 이름만 같고 실제는 각기 다른 사업자들이 자기 일을 하는 체제와는 확연히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맡게 될 조세 소송 건수가 대한민국 전체 조세소송의 10%가 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잉여자본이 많이 쌓이면 그만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질 것이다.

 

나의 좌우명

싱겁지만 가화만사성이다. 집안에 웃음이 있어야 바깥 일도 무탈하다고 믿는다. 집안에 웃음을 가져오려면 먼저 두 아이의 엄마인 아내가 행복해야 할 것 같다. 아내에게 말 한마디라고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아내가 원하는 바를 아내의 언어로 말해주는데 미숙해 미안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를 최고의 남편으로 믿어주는 그녀가 있어서 힘이 난다. 사업 초창기에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떻게든 사업 기반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라 술자리를 다 마다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귀가가 늦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술을 함께 먹어주지 않아도 내 손님들은 계속 자가 증식(?)을 하는 중이다. 덕분에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어 좋다.

 

요즘 읽는 책

삼국지, 열국지, 수호지, 손자병법 등과 같은 시리즈물을 좋아한다. 실용서는 잘 읽지 않는다 읽을 때는 철저히 재미를 기반해 읽는다. 1주일에 보통 한 권, 시간이 없을 때는 1달에 1권을 읽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꾸준히 읽는 것이고, 시리즈를 반드시 끝낸다는 것이다. 재미있어서 읽지만 그것들이 다 좋은 공부가 된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역학 구도와 상황들이 사업에 대비해볼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된다. 사업상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책에 담긴 지혜와 통찰이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현재 <로마인이야기> 4권째 읽고 있다. 덕분에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푹 빠져 있다. 가끔 아내가 읽는<파페포포 이야기> 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야기 책도 즐겨 읽는다. 조세에 관한 것은 조세주간 속보를 꾸준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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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er's Note

 

 

그를 만나러 나선 길은 많이 막혔다. 경부고속도로는 평일에도 시행되는 버스 전용차선제 때문에 교통상황은 언제나 참혹하다. 차가 막혀 답답해하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저 도착했는데요.’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을 아직 30분이나 남겨두고 있다. ‘이 아저씨, 조금 심하네. 10분도 아니고 30분이나 일찍 도착하다니! 약속 시간에 언제나 턱걸이로 도착하는 내게는 약속 장소에 너무 일찍 나타나는 사람은 비호감(^^*)이다. 나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그는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얼굴, 무척 동안(童顔)이다. 세무사라면 적어도 40대는 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편견이 순간 작동을 했고 나는 내심 놀랐다. 그를 내게 소개한 이전 인터뷰이 길용씨는 그가 지금 새로운 도약을 맞고 있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그가 꽤나 세무사로서 직업적 성공을 이룬, 나이 지긋한 남자일 거라고 일찌감치 결론을 내버렸던 것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아닙니다. 이런 자투리 시간을 반갑게 생각하고 잘 보내려고 합니다.’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에게서 나는 다시 삶의 기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거창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사결정을 할 때 그를 움직이는 내적 가치는 아무래도 그 기반이 신앙에 있어 보였다. 종교가 독단과 거품을 걷어내고 그 본연에 충실할 수 있다면, 교리를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고 내 스스로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면 삶의 많은 군더더기들이 제거될 것이다. 낙용씨 삶은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가 다른 이의 행복이나 발전을 앞서가지 않는, 잡티가 비교적 적은 맑은 삶처럼 내게 다가왔다. 특히 돈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런 이미지를 획득한다는 것은 인상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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