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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20시 17분 등록

어느 날인가 친구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승객들이 적어 한산한 차내는 오후의 졸음을 즐기기 딱 좋았다. 기분 좋게 밀려드는 졸음을 받아들이며 막 고개를 떨어뜨리려는 순간 객차의 앞에서 한 목소리가 울렸다. ‘단 돈 이천원’을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였다. 나이는 중년쯤 되었을까. 상인은 열심히 제품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심심하던 차에 구경이나 한다는 듯 했고 일부는 시끄러운 소리에 약간 짜증섞인 표정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인은 제품의 장점을 설명해 나갔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순서대로 제품을 들고 객차를 한바퀴 도는 것이었다. 객차를 한바퀴 돌았지만 승객들은 아무도 그 제품을 사지 않았다. 주섬주섬 짐을 챙긴 상인은 다음 객차로 발을 옮겼다.

그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는 상인이 자취를 감추자 한마디를 던졌다. “야, 너 같으면 저거 할 수 있겠냐.” 친구는 지하철 상인을 볼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단다. ‘어느 순간 회사에서 밀려나면 내가 저런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내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아마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사람 사는 건 누구나 비슷한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지하철 상인을 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직장을 다니지 않게 되면, 소득이 없어지면, 내가 저렇게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당장 생활비가 떨어지고 아이들 교육비도 없다면, 그런 상황이 온다면, 눈 질끈 감고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지금 저 자리에서 물건을 파는 저들도 승객으로 앉아있는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게 살아왔을 것이다. 어떤 일이 저 사람을 저 자리에 서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도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 물건을 판다. 그도 자신이 그 자리에 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객차에 서서 물건을 팔고 있는 그나, 자리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누구나 지금의 자리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먹고 산다는 절박함과 생존이라는 명제는 사람의 모습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고는 한다.

IMF이후 최악의 불경기라는 요즘이다. 불경기는 곧 위기를 말한다. 위기는 직장인에게나 자영업자에게나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최근 기사를 보니 직장인 중의 80%가 비굴모드를 경험했다고 한다. 구조조정 압박이 커지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상사와 의견이 달라도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상사의 썰렁한 유머에도 박장대소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부장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요” 같은 마음에 없는 아부성 발언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기도 민망하고 스스로에게도 씁쓸한 생각이 들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한다. 휴일에 출근을 하기도 하고,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사항을 일일이 브리핑하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이다.

생존은 그런 것이다. 생존은 자존심을 넘어서고 자긍심도 넘어선다. 자신이 듣기에도 민망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고도 남는 힘이 있다. 생존 앞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서 당당해질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모든 가치를 가볍게 넘어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그렇게 사람을 제압한다.  IMF시절에 세상을 만만히 보고 뛰쳐나갔던 사람들의 행로를 본 직장인들은 이제 그런 호기 혹은 오만을 부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아무리 심한 소리를 들어도 선뜻 속에 쌓아놓은 마음을 쏟아놓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말한다. “부장님 덕분에……” 어느 날 지하철에서 목소리 높여 물건을 팔지 않으려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뻔히 보이는 길로 걷는다. 그 길에는 생존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미리 생각하기에는 사치스러워 보인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한 상사가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웃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상사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는 왜 웃지를 않나. 이야기가 재미없나?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죄송한데요, 저 오늘 회사 그만둬요.
직장인들이 솔직해 질 수 있는 건 회사를 그만둘 때뿐인가 보다. 아니 그때마저도 솔직해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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