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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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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1일 20시 30분 등록
 

‘놓아버림’이 전환을 줄 수 있을까?

당신의 종교는 당신을 구원하고 있는가?

종교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참으로 위험할 수 있다.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코끼리의 일부분을 설명하는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서 그렇고, 특정 종교의 비판이 그 종교의 가르침에서 천국과 극락을 찾으려하는 광신도에게는 상처와 원한을 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를 다 찬양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정치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관한 글은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신학을 제대로 배워 본적이 없었고, 불경의 원문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두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자승자박을 하는 행위이겠지만, 지금 나는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비교분석해 보려고 한다.


각 개인의 구도행위에 따라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는 어머니에게서 전해 받은 가교(家敎)였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모태불교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절에 따라 다녔고, 우리 집에는 스님들이 자주 오셔서 식사하고 가셨다. 엄마가 읽으시던 불경과 늘 들으시던 찬불가 테이프 등이 곳곳 굴러다니던 우리집은 온통 불교문화의 산물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고 난 자연스럽게 그 문화에 동화되며 성장했다. 

그 당시 내가 만난 불교는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들어가야 구원에 이르는 어려운 종교였다.  의지가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쇼펜하우어의 학설처럼 인간의 의지가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다. 문제는 이때 자신의 한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통하지 않을 때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던 것이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할 때는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인간의 노력이 한계로 등장한다. 석가모니가 이루어간 수행을 본받아 우리 역시 그리해야만 성불이라는 ‘최고선’을 이룬다는 목적 지향을 할 때, 제일 먼저 자신의 한계를 만난다. 불교도로서의 나는, 해결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만을 보았다. 그래서 절에 다녀올 때마다 마음 편하신 엄마와는 달리 나는 더 힘들었다. 불경을 읽고 108배를 매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매일 마구니를 만났고, 마음은 무간지옥이었다.  


삶에서 내가 만난 고통은 열대를 걸어가다 늪에 빠져버린 형상으로 다가왔다.  혼자 힘으로 아무래도 그곳을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지나가던 유교학자는 야단친다. “왜 그곳에 가서 늪에 빠졌냐고, 내가 거기 가지 말라고 했지 않냐” 고 사람이 죽든 말든 계속 도덕 가르침만 들먹인다. 그때 부처가 나타나 늪에 빠진 내게 그곳을 나올 수 있는 온갖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내게 불교는 그런 역할이었다. 그는 자신도 그곳에 빠진 적이 있어서 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온갖 현란한 기술을 가르쳐주지만, 정작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혼자 나오란다. 내 힘으로 나가야 한단다. 시키는 대로 해봤다. 조금 오르는듯하다가 이내 더 깊이 빠진다. 차츰 힘이 딸린다. 원래 강한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부처로부터 배운 기술을 이용하여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나 같은 약한 자는 그렇게 늪에 빠져들어 죽어갈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불교도들이 성불 근처도 못가고 마구니 탓 만하며 죽어갔을까?


그런데 기독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정체모를 줄을 하나 하늘에서 내려주며 잡으라고 한다. 의심하여 잡지 않으면 수렁 속에서 죽을 것이고, 그냥 믿고 잡으면 살 것이라 말한다. 생전 처음보는 낯선 줄에 내 목숨을 의존하라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본 줄인데 그게 썩은 새끼줄인지 튼튼한 동앗줄인지 알지 못한다는데서 첫 번째 시험을 만났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 끈을 잡았다. 하늘로 조금 오르는 듯 보였다. 그런데 무거워서 올려줄 수 없다고 메고 있던 여행배낭을 버리라고 한다. 그게 ‘구원의 손’이 하는 말인지 그 손을 빙자한 ‘줄 관리자’가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줄곧 그 말을 해댄다. ‘니가 올라갈 하늘에는 그 배낭속의 물건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 아무 필요 없다’고 한다. 게다가 주머니속의 동전 한닢 까지도 무거우니 아래 늪으로 던져버리라고 한다. 망설이는 내게 자신이 그 돈이 필요해서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 한다. 그가 데려갈 유토피아에는 황금이 가득하여 내 주머니의 동전 몇 닢은 도무지 아무 가치를 가질 수 없으니, 다 던져 버리라고 한다. 가벼워야 하늘의 유토피아로 오를 수 있다 한다. 전부 다 던질 것인가? 일부는 남길 것인가? 내가 원한 건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었지 하늘로 오르는 건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그게 신의 선택이란다. 내가 하늘에 오를 존재로 만세전 태초전부터 기록되어 있었단다.

  

버릴지 말지를 놓고 오래동안 저울질 했다. 아무래도 단숨에 올려줄 것 같지 않은 ‘그 손의 주인’ 인지 ‘줄 관리자’인지가 나를 챙겨줄 때까지 가방속의 도시락도 필요하고 물도 마셔야 하므로 배낭이 아무래도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인가 줄은 하늘로 오르는 듯 하다가 멈춘다. 오히려 손을 놓아 늪으로 다시 추락하게 만들듯 위협한다. 차츰  ‘내가 배낭과 동전을 다 버렸더라면 하늘에 올라갔을까?’ 라는 자책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가방과 내 몸의 무게를 견디던 팔에 힘이 빠진다. 그렇다고 줄을 놓아버리자니 다시 늪에 빠져버릴 것 같다. 줄을 놓지 못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는 줄을 잡고 죽어 가고 있다. 가방을 던지지도 못하고, 줄을 놓지도 못하는 내 욕심이 나를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래도 나는 끝까지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 ‘포기하지 못함’이 내 고통의 근원이었다. 늪에 빠져 죽어 버리든 배낭을 던져 버리고 굶어 죽든, 빈털터리로 개털이 되든 그냥 포기하면 고통은 없었을 텐데, 포기 못함으로 인한 고통으로 나는 죽어갔다.


오랜 나의 이 문제에 대하여 니체의 다음 글이 나를 위로했다.

“ 그리스도교는 강자의 정신을 약화하여 권태롭고 허약해진 순간을 이용해 자랑스러운 확신을 불안과 양심의 가책으로 바꿈으로써 파괴하려 한다. 또 고귀한 본능을 약화하여 그러한 본능의 힘, 즉 힘에의 의지가 본래의 성질과 달리 내부로 향할 때까지, 강자가 과도한 자기 비하와 가지 희생으로 소멸할 때 까지 병들게 하는 방법을 안다. 섬뜩한 소멸의 길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는 파스칼이다.”      

러셀의 비평처럼 니체가 정신병질을 가졌든, 여성비하와 논지의 모순으로 예상할 수 있는 편협한 고집불통자의 신경질적인 철학이든, 나는 니체 철학을 맹종하거나 혹독히 비평하거나 그 어떤 선택도 아직은 할 수 없다. 그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한 채 섣부르게 어느 쪽으로 내 위치를 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했던 현상이 내게도 정확하게 일치했다는 점이 그의 쪽으로 우선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의 글을 보며 나는, ‘어라 이것 봐라?’ 하는 반응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그의 말은 기독교도로 택함을 받은 후 내가 거쳐 온 여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파스칼이 당한 현상을, 강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도 겪고 있었기에 그의 현상 분석이 내게는 진리로 다가왔다.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편안한 신자들, 사교의 장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 때로 계획된 의도에 의해 기독교재단의 직장에 채용되기 위한 증빙서류를 만들기 위해 신자 인척하는 교인들이 매주일 교회마당을 밟고 간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편안하게 교회를 가지 못했다. 언제나 나는 그곳에 가면 죄인이었고 속으로 통곡해야 했다. 배낭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고 동전 하나까지 포기 못하는 나를 자학하며, 아무리 버리려 해도 본능에 남아 있는 내 욕심을 어쩌지 못해, 가슴 치며 울던 세리처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본능으로 선데이 크리스챤으로는 살 수 없었고, 남의 힘을 빌어 늪을 나오지도 못하는 나는, 언제나 내가 책임을 지며 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책임이 불교인인 나를 힘들게 했고, 기독교도인 나를 죄수 중의 괴수로 만들었다.

과도한 책임이 주는 고통, 어쩌면 그 책임을 놓아버림으로 나는 ‘전환’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파스칼을 소멸하게 만든 과도한 자기 비하와 희생으로 인한 병듦을 지나왔음으로, 이런 식으로 가다간 곧 소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불면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으려면 손을 놓아버려야 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그 종교가 당신을 구원으로 이끌었는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가 당신의 그 손은?

혹시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도 말하고 싶다. 이제 그 동앗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 편한 잠을 자라고.....

어떤 선각자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그 손을 놓아도 그가 우리의 손을 잡고 있으므로 다시 늪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처음부터 우리가 줄을 잡은게 아니라 그의 손이 우리 팔을 잡고 있었다고.. 단지 문제는 의심 많은 우리가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있다’고....... 

나는 내가 줄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잘 잡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아프다면 이제 놓아버리는 ‘인지전환’이 필요할지 모른다. 한번 뿐인 삶이다. 종교를 바꾸는 혁명기를 거쳐 온 내가, 마음 하나 바꾸지 못한다는 건 이미 치워진 가상의 유리벽을 넘지 못하는 수족관 물고기의 ‘학습된 무기력’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나는 놓아버림으로, 내가 손을 놓아도 다시 늪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음을 경험하고 싶다. 아니 그가 내손을 처음부터 잡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싶다. 혹 손을 놓아 힘을 빼니, 그가 나를 잡아 늪에서 끌어내기가 더 쉬워져, 일순 하늘로 오르게 된다면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이리라. 그 은총의 순간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오래전 ‘현신’했던 그의 실존을 간절히 다시 보고 싶다. 


  

IP *.67.1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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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10.31 21:52:24 *.197.63.64
...

하지만 미련 없이 후회 없이 후련히 살아보자.

가을이 깊어가누나.

마음도 깊어지누나.

세상 끝날에 게을렀다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살다가고 말았다고는 하지 말자...

울며 숨을 거두면 가슴이 너무 미어질 것 같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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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2010.11.01 05:08:41 *.67.106.3
언니
말씀대로 죽는날 내이리될줄 알았다가 안되려면 매순간 연소를 해야 하는데
그로 인해 숨이 턱턱 차오릅니다
손놓고 쉬려는 것은 포기함이 아니라 호흡 고르기 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무언가를 포기함'은 포기하지 못하는 무엇을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니 인간의 비움은 불가할까요?

교리의 한계인지 신학자들이 만든 함정인지 얄팍한 교회지킴이의 악의인지는 모르나
교회내에 저와 같은 사람이 제법있더군요
어찌해야 합니까?
내 도무지 너를 모른다 하실까 두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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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
2010.11.01 08:16:39 *.6.126.98


인간이 삶에 대해 고뇌하는 이유는 지능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지능이 인간처럼 발달되지 못한 동물들은 전혀 이렇게 괴로와 하지 않는다.
인간은 원숭이과에 속하는 그저 동물일 뿐이다.
10년 전 밝혀진 DNA의 완전해독으로 이제 그 모든 사실이 밝혀졌다.
150년전 찰스 다윈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온 존재라고 말한 것이 드디어 과학적으로도 완전히 밝혀졌다.
DNA분석결과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가 99% 똑같음이 밝혀졌다.
이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짓을 기독교는 하지 말하야 할 것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원숭이와 같은 동물에서 진화해 온 그저 동물일 뿐이다.



인간의 지능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하고,  생존의 조건들을 더욱 더 윤택하고 풍부하게는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어서까지도 계속 살고싶다고
죽어서까지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고 발악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서
종교를 가지고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 가고자 안달을 하고 있다.


지구는  거대한 하나의 박물관이다.
지구 곳곳을 보면 지구상의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진화해 왔는지
그래서 그 실체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과 불교 .. 그 어떤 종교도 공룡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인간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 등등
우리의 조상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지구의 땅속 화석은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동물들은 도덕과 양심이 없고 인간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물들도 도덕과 양심이 있다.
한무리의 사자나 한 집단의 개미를 보면 저마다 각자 역할이 있고 규율을 지키고 살아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회속에서 각자 해야할 일이 있고, 지켜야할 규범이 있으며 ,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도덕이고 양심의 근원이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해 온 존재라는 것을 알면 이세상의 안풀리는 의문은 없다.
예수도 부처도 모두 사기꾼이고 망상가일 뿐이다.
종교를 말하는 모든 교주들은 위선자들이다.
다만, 그들이 귀로 듣기에는 참으로 그럴싸한 말로  기분을  즐겁게 하고  희망을 말해주고 똑똑해 보이니까
존경하고 박수쳐 주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에는 5살짜리 꼬마 아이가 죽어간다.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병이나 사고나 범죄등등으로..
이런 꼬마아이의 죽음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그저 우연히.. 자연적으로.. 환경에 맞춰서.. 돌아갈 뿐이다.
어떤 특별한 구조의 연결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어떤 행위에 대해 그것을 그저 죄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죄가 됬지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 천국, 지옥, 죄, 양심, 악마, 천사, 성령... 등등은 모두 신성한 거짓말이다.
사자가 물소를 잡아먹었다고 사자에게 살인죄를 적용시킬 수 없듯이
인간도 그 어떤 죄를 저질러도 그것은 인간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벌을 받는 처벌만 받을 뿐
그것은 죄가 아니다.
( 죄가 없다고해도 나는 법을 지키며 살고 있고, 양심에 맞게 행동해야 인간성이 파괴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동물에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기에.. )



과학이 진실을 말해준다.
DNA가 진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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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호리바람
2010.11.01 08:58:24 *.145.204.123
과학이 진실을 말해준다.
DNA가 진실을 말해준다
.

과학이 진실을 말해줄수도 있지만 
과학하는 인간의 한계는 어쩌나요?

메뚜기를 연구하던 생물학도가 메뚜기 다리를 잘라내고 이렇게 명령 한다
"뛰어 뛰어봐 뛰란 말이다"
다리 잘린 메뚜기는 뛸리가 없다
그러자 환호하는 실험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메뚜기는 다리를 자르면 듣지 못한다" 라고

이런 식의 오류투성이인 과학인지라 ..........

신을 섣불리 믿는 자도  어리석지만
그런거 없다고 단언하는 자는 더 위험할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그대는 신이 없다는거 어떻게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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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
2010.11.02 11:14:46 *.6.126.98



2004년 12월 동남아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2008년에는 중국 쓰촨성에서 지진으로 10만 가까이가 죽어 사라졌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보고서도 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해 2천명 정도가 추운 바다 한가운데에 빠져서 얼어 죽은 것은 그 배를 만든것이
인간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할 수는 있지만
쓰나미나 지진같은 자연재해로 사람들이 1살짜리에서 부터 90살에 이르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죽음을 당하거나 장애인이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신의 말씀이 있다는 성서를 보면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가라는 이성적인 말투의 신의 말씀이 나온다.
그럼 왜 신은 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살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이성적이지 못할까?
신이 온 우주와 이 지구와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자연재해도 분명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책임일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처참하게 죽도록 하는 것이 과연 이성과 사랑을 가졌다는
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인간은 신앞에서 모두 죄인이라고 기독교에서는 가르친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아담과 이브라는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신의 노여움으로 원죄를 뒤집어 썼기 때문이란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후손들도 , 즉 지금의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도 그 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도저히 말이 안되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아버지가 살인죄를 저질렀다면 아버지에게만 그 죄를 물어야지 어찌 아무 잘못도 없는 그 자식에게도 살인죄를
적용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 죄를 적용시킬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누구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되어서 40조원이라는 정말 말도 안되게 어마어마한 재산이 주어져서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교회나 다니며 죽어서 천국에 가도록 하고,
누구는 하루에 1달러도 받지 못하고 굶주리다가 영양실조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교회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신을 믿지도 못하고 죽어서 지옥으로 가도록 하고...
이것이 과연 신이 이성과 합리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




2007년 8월, KBS 1TV에서는 < 경이로운 지구 >라는 과학다큐멘터리 6부작이 방송됬었다.
지구가 45억년 이라는 엄청난 세월동안 어떤 활동을 하며
인간은 바다에 떠다니는 작은 미생물에서 어떻게 지금의 고등한 생물로 진화해 왔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그 프로를 보고 또 보았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때까지 나를 숨막히게 옥죄어 왔던 종교의 억압과 갈등에서 나를 구원해준 한줄기 빛이었다.
죽으면 또 태어날까?
현실에서 지은 죄는 죽어서도 그 벌을 받게 될까?
이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를 없게 해주었다.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그저 자연환경에 맞춰서 진화해 온 생물일뿐
이성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독창적인 존재자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진화론으로 이 세상을 보면 모든 삶의 의문이 풀린다.
인간은 자신들이 지구상의 동물들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단지 지능이 높다는 능력 때문에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차원의 특별한 존재자로 인식해 왔고 그로 인해서 허황된 그 어떤 특별한 세계를 찾고자 발버둥을 쳐온 것이다.
인간은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다.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인식의 틀은 넓어졌지만
대신에 그 댓가로 그 넓어진 인식을 통해서 삶의 존재의 의미와 고뇌에 대해서 갈등하고 찾고자 하는 개고생을
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지능이 낮은 바보는 보통 항상 헤~ 하고 잘 웃고 특별히 어떤 철학적인 정신의 갈등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머리가 똑똑할수록 고통받고 고뇌에 몸부림 칠 가능성이 높다.
천재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머리가 무식했다면 그렇게 삶의 고뇌에 몸부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 이라는 말이 있다.
진실은 진실인데 애써 피하고 싶고 떨쳐 버리고 싶을 때 인간이 쓰는 말이다.
인간은 행복과 쾌락과 안락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그런 것을 느낌으로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고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 진실이 그런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는다면 인간은 진실대신 거짓이라도 좋으니 그저 즐겁고 행복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만 믿으면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말을 했나보다.
< 행복을 바란다면 신을 믿어,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다면 질문을 해 >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진화론은 점점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진화론은 불편한 진실이고,
창조론은 행복한 거짓이다.




나는 처자식이 없지만 만약 있다면 , 그래서 그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따르겠다면 나는 찬성하고 지지할 것이다.
무식하다 하더라도,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종교를 믿고 의지해서 행복해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죽음을 팔아먹고 사는 것이지만
꿈을 말하고 희망을 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아주 좋은 정신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또 삶의 위로와 힘이 되어준다.
죽어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
항상 누군가가 너의 편에서 너를 지켜준다는 말..
영원히 살 수 있겠다는 말..
이 얼마나 솔깃하고 환상적인 말인가 !!
거짓이라도 좋으니 현실의 삶에서 위안과 힘이 되어주기에 종교는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와 유전자가 99% 똑같은 한낱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인 인간들이..
원숭이처럼 음식을 먹고
원숭이처럼 섹스를 하고
원숭이처럼 화를 내고
원숭이처럼 웃고
원숭이처럼 잠을 자고
원숭이처럼 새끼를 낳고 살면서
자신들은 원숭이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이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일이요
닭잡아 먹고 오리발을 내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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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넌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7] 맑은 김인건 2010.10.31 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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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미션 개 파서블 [11] 은주 2010.10.31 2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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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하계연수 단상21 - This is the moment. file [1] 書元 2010.10.30 2363
1974 영동고속도로 덕평휴게소내 주유소 충전소 오픈 [1] 덕평주유소 2010.10.30 2423
1973 중국및해외 홈페이지제작 및 홍보대행 서비스 [3] 박광우 2010.10.29 3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