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신진철
  • 조회 수 2481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0년 11월 3일 10시 04분 등록

여인혈전-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오늘 아침 재미난 일이 터졌다. 평소 평화로워 보이는 우리 집이지만, 종종 전쟁이 붙기도 한다. 대체로 시간에 쫓기는 아침시간에 불이 붙는다. 출근 시간과 학교 갈 시간들에 쫒겨 서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화장실 사용시간 하나도 예민해지고, 밥 먹고 치울 시간마저도 빠듯하기 때문에 호흡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삐끗하고 감정이 상하기 십상이다. 제일 흔하게 붙는 경우가 어머니와 8살 된 하영이다. 기질적으로 둘 다 고집이 세고, 활동적인 편이서 일단 싸움이 붙으면 가끔씩 집안 전체로 전운이 감돌기도 한다.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머리빗을 챙겨들었고 하영이는 내게 머리를 맡기고서 주문을 하기 시작한다. ‘너무 세게 빗지 마라’ ‘묶을 때 조금 느슨하게 해 달라’ ‘머리가 쳐지면 불편하니까, 조금 위쪽으로 올려 묶어 달라’ 등등. 하루도 그냥 다소곳하게 묶어주는 대로 학교에 가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다.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 머리를 감는 습관 덕분에 머리카락 끝은 항상 꼬여있게 마련이다. 당연히 머리를 빗다보면 아프게 마련이겠지만, 그것도 그냥 참아 넘기지 못한다. 때문에 머리를 빗는 1분 정도의 시간이지만, 둘의 팽팽한 신경전과 입씨름은 매일 아침 반복된다. 결국 오늘 아침, 실타래처럼 엉킨 머리끝을 조금 세게 빗질을 했더니, 기어이 하영의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아빠아-”

아빠라는 것인지, 아프다는 것인지. 아무튼 주춤하고 손을 멈춘 순간, 어머니가 진화에 나섰다. 노련한 달인의 솜씨로 빗질을 새로 하고,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올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입에 물었던 머리끈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하셨다. 3년차 어설픈 머리묶기 선수는 그저 63년 달인의 솜씨에 감탄할 따름이었고, 그 손놀림은 8살 손녀의 입마저도 확실하게 잠재웠다.

 

어머니의 승전보는 다음 라운드로 이어졌다. 바깥 날씨가 추우니, 두꺼운 핑크색 파카를 입고 가라고 먼저 어머니가 선방을 날렸고, 하영이는 얇은 점퍼를 입겠다고 맞섰다. 이미 지난 라운드에서 승기를 잡은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지만, 무엇하나 아랑곳하지 않는 하영이도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위기일발... 일촉즉발의 여인혈전이었다. 설전의 양상은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의 법칙을 무시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두 개의 대극점에서 한 치의 양보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듯 보였다. 마치 핑퐁게임을 하듯 주고받던 말들이 알레그로allegro...악셀레란도accelerando의 리듬을 타더니, 급기야 스!타!카!토!

“왜 맨날 내가 입고 싶은 거 못입게 하는데-에?”

“얼어죽든 말든 니 맘대로 해!!!”

 

딱, 지금이다. 이번에는 내가 중재자다. 이 순간을 놓치면 내가 끼어들 틈이 오지 않는다. 빠르고 힘차게 제압하듯 대사를 뱉어야 했다.

“하영! 니가 입고 싶은 거 입어. 아무도 안 말려. 자.. 어서”

나의 개입에 불편해진 어머니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신다. 불편하기는 하영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충분히 토라진 표정이었지만, 8살 자존심도 분명한 자존심이었다. 가방을 벗어놓고, 내 손의 점퍼를 낚아채듯이 채가는 하영은 제 뜻대로 입고 싶었던 옷을 입게 되었다. 이제는 제법 표정관리도 할 줄 안다. 제 뜻대로 되었지만, 아빠의 개입으로 제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불편모드를 화해모드로 전환시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대문 밖을 나설 때까지는 그래야 한다는 것쯤은 매일 겪는 할머니와의 전쟁을 통해 훈련되었을 것이다. 다시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챙겨들고 ‘휙’하고 돌아나가려는 하영에게 말했다.

“하영! 할머니한테 인사는 해야지.”

승자는 너그러운 법이다. 까짓껏 양보 못하겠냐는 하영은 “다녀오겠습니다”를 또박또박 뱉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달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주부학교에 가시려고, 머리를 감기 시작한 어머니께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다. 2층으로 올라와 아침에 내렸던 식은 커피를 한 모금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막 한 모금을 빨아 뱉는 참이었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쿵.쾅.쿵.쾅’ 발소리가 났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에 두꺼운 파카로 바꿔 입고, 대문을 나서는 그녀가 보였다. 잠시 전, 전쟁에서 승리했던 8살 아테네 여신은 추웠던 모양이었다. 소리 안나게 조용히 대문을 닫고 나서는 모양이 불과 몇 분 전의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제가 별 수 있나.’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 건 결국 나였다. 아니 모두의 승리였다. 잠시라도 모두 승리를 맛보았고, 고집스럽게 지키려던 승리의 허무함도 깨달았다. 동굴 속에서 세상을 알지 못하듯, 집안에서는 바깥 날씨를 알지 못한다. 하영의 최종 선택은 아직 철을 깨닫지 못한 본인의 스타일도 어머니의 주문도 아니었고, 더구나 아빠의 편들어주기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아침 추워진 날씨였다. 추워봐야 안다. 세상 밖에 나가봐야 알게 된다. 본인이 직접 겪어봐야 깨닫게 된다.

 

이제 다시 어머니를 뵈야 할 시간이다. 아이들 문제로 작은 갈등들이 계속되고 있고 종종 어머니의 소외감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매번 소재는 달랐지만, 이런 가치관의 충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밥을 먹는 식탁에서, 우산을 두고 간 날 아침이나, 체육복을 두고 간 날 등. 하록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두 달 전부터 내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점점 더 자주 부딪히고 있다. 비록 그 때마다 상황은 달랐지만 내가 어머니께 드리는 메시지는 오직 하나다.

 

지난 여름, 토요일 점심 아이들의 하교시간에 맞춰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빨래를 걷고 난 어머니의 마음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나더러 ‘가서 얘들을 데려와야지 않겠냐’고 물으시더니, 마음을 고쳐먹은 듯 당신이 직접 우산들을 챙겨들었다. 그러는 어머니를 말렸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고, 폭우처럼 오는 것이 아니니 놔두자고 했다. 그러는 나를 어머니는 ‘참 무심한 놈’이라고 핀잔을 하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의 셈이 있었다. 하록이는 이미 5학년이고, 하영이도 8살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해법을 찾기를 바랬다.

 

우산을 가져다 주는 버릇이 든 아이는 학교가 끝나고도 집에 갈 줄을 모른다. 엄마나 할머니 또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우산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에 스스로 해결할 필요가 없다. 그냥 교실이나 학교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그렇지만 집에까지 자신이 알아서 가야하는 아이는 머리를 써야 한다. 비유가 좋은 놈은 친구 우산 밑으로 끼어들기도 할 것이고, 깡다구가 좋은 놈은 신발주머니나 책가방을 뒤집어 쓰기도 할 것이다. 꾀가 많은 놈은 교실로 돌아와 주인없이 나돌던 우산을 기억해낼 것이고, 넉살이 좋은 놈은 선생님의 우산을 빌리기도 할 것이다. 운이 좋은 놈은 금방 비가 그쳐줄지도 모르고, 맘이 좋은 놈은 집에서 우산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친구와 같이 놀아주기도 할 것이다. 실로 하나의 상황에서 자신의 잠재력과 기질을 총동원해서 선택할 수 있는 해법이 무궁무진하다.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장점도 알게 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닥쳤을 때 당황하지도 않게 된다.

 

우산을 가져다 주는 일. 겨울 파커를 내어 주는 일. 나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무한한 헌신에 늘 감사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나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IP *.186.57.121

프로필 이미지
2010.11.03 18:46:38 *.230.26.16
아마 그것은 사랑이었을 겁니다.
엄마의 사랑, 할머니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는 다르니까요.
 -전 정말 다르다고 느낍니다-
아마 엄마와 할머니의 사랑도 조금은 다르겠지요. 그렇지만 사랑은 다 큰 사랑입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을 가져다주는 엄마와 할머니,
그 손길에 아이는 멀리서도 따뜻한 보살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는 것도 좋겠지요.
모든 것이 다 옳고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가 아닐까요?
또 각자의 성향의 문제도 큰 듯하네요.
일하는 엄마탓에 갑자기 비가 와도 우산을 가져다 주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던 저의 큰딸은
사물함에 작은 우산을 가져다 놓는 나름의 대책을 세웠답니다.
그래도 여름 한 낮 우산을 들고 나타난 저를 보고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때가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손을 떼고 떠나갑니다.  
그 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까지 우리는 나름껏, 사정껏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 밖에요 ^^
하영이는 기질이 강한 편인가봐요. 
아마 오빠의 대응이 어머님 방식보다 더 아이에게 적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요. 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0.11.04 19:46:13 *.186.57.121
얘들 학예회가 있는 날 아침.. 짧지만 깊게 꽂혀드는 느낌을 놓치기 싫어서..
앉은 자리에서... 쭈-욱 잡아뽑아낸 건데..쓰면서 선형이 봐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전화했삼..ㅎㅎ
딸랑구 유치원 발표회는 잘 했구?
댓글이 가을비 맞고 난 다음...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 같다... 고마우이..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0.11.04 07:28:42 *.160.33.180
진철이의 글은 재미있게 흘렀으나 끝에서 서둘렀고,  선형이의 글은 급히 비 속으로 나간 진철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구나.    

진철이는 어떤 책을 쓸 것이냐 ?   수염을 뽑으면서 생각해 봐라. 
프로필 이미지
진철
2010.11.04 19:41:03 *.186.57.121
덕분에 비도 좀 맞고, 짝궁이 건네준 우산의 고마움도 알게 되었습니다.
애써 기르고 있는 수염을 뽑으시라니, 너무하십니다.
대신 머리칼을 쥐어뜯고는 있는데...
머리털만큼 욕심은 많고, 생각만큼 갈피는 잘 안잡히고...
점점 담배만 늘어가는 듯 합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92 하계연수 단상23 - 인연은 운명과 같이 일어난다 file [8] 書元 2010.11.07 2852
1991 칼럼. 꿈이 없던, 꿈이 없는 영덕이 [9] 김연주 2010.11.07 2598
1990 [칼럼] 서호납줄갱이의 비밀 file [12] 신진철 2010.11.06 7997
» 여인혈전-그것이 사랑이었을까 [4] 신진철 2010.11.03 2481
1988 [먼별2] <단군의 후예: 사색하는 나무 디자이너 최성우님 인터뷰> [9] 수희향 2010.11.01 2698
1987 응애 39 - 문상을 다녀와서 [2] 범해 좌경숙 2010.11.01 2657
1986 세계의 기원 [5] 박상현 2010.11.01 2911
1985 칼럼. '가가호호 아이둘셋' file [6] 이선형 2010.11.01 3847
1984 감성플러스(+) 27호 - 내일을 향해 써라 file [5] 자산 오병곤 2010.11.01 2444
1983 [컬럼] 리더의 철학! [7] 최우성 2010.11.01 2327
1982 [칼럼] 동청冬靑이라는 나무가 있다 [10] 신진철 2010.11.01 2764
1981 넌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7] 맑은 김인건 2010.10.31 2587
1980 '놓아버림'이 전환을 줄수 있을까? [5] 박경숙 2010.10.31 2977
1979 미션 개 파서블 [11] 은주 2010.10.31 2769
1978 칼럼. 4차원 성철이 [4] 연주 2010.10.31 2323
1977 라뽀(rapport) 29 - 나는 그녀가 그해 가을에 한 일을 알고있다. 書元 2010.10.30 2882
1976 하계연수 단상22 - 돈키호테가 풍차로 간 까닭은? file [2] 書元 2010.10.30 3207
1975 하계연수 단상21 - This is the moment. file [1] 書元 2010.10.30 2363
1974 영동고속도로 덕평휴게소내 주유소 충전소 오픈 [1] 덕평주유소 2010.10.30 2423
1973 중국및해외 홈페이지제작 및 홍보대행 서비스 [3] 박광우 2010.10.29 3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