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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8일 02시 38분 등록
개인의 역사는 무엇으로 남는 것일까요? 무엇이 떠오르세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글입니다. 혼자서 밤에 홀짝홀짝 써내려간 일기는 의미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요즘처럼 변경연 게시판에 쏟아내고 있는 흔적들은 미래를 꿈꾸는 현재이자 치열했던 과거로 기억될 것입니다. 또 2년간의 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정식 연구원이 되기 위해 책을 내게 된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개인의 역사로 남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사진입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덕에 누구나 눈부신 순간을 아름다운 과거로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 필름 카메라로 한 장씩 아껴 찍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대신 쉬움과 빠름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길을 걷다가 하늘이 고우면 한 컷.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벌개진 얼굴들이 흥겨우면 또 한 컷. 아장아장 뒤뚱뒤뚱 첫 발을 떼는 아이의 걸음마에 연이어 몇 컷. 농도는 흐려졌지만 빈도가 그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는가 싶게 되었습니다. 순간은 사진 속에 남아 또 하나의 좋은 역사가 될 것입니다.

글과 사진 모두 미래 속에 현재를 과거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기억시킬 것입니다. 역사가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조그만 사고가 생겼습니다. 지난 5월 18일 그러니까 금요일에 스승의 날 모임을 위해 북카페로 향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컴퓨터가 켜지질 않는다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묻습니다.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화로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보통 인내심으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간단한 응급 조치를 전화 너머로 알려주었는데 별다른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냥 별일 아니니까 내가 집에 돌아가서 손 보겠다고 아내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과 동료들과의 행복한 시간 속에서 컴퓨터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토요일에는 처남 결혼식이 있어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컴퓨터를 한두 해 다룬 것도 아닌 터라 느슨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상황을 살펴보니, 이거 문제가 심각합니다.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해서 설치한 하드 디스크가 통째로 먹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가슴이 철렁하더니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피해 현황 파악에 돌입했습니다. 잡다한 작업 파일들은 그냥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진이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현상은 하지 않고 차곡차곡 컴퓨터에 쌓아놓았던 우리 부부의 역사가 다 그 하드 디스크에 들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웃음과 눈물을 쏟아가며 찍어낸 아이의 역사도 몽땅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일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습니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내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서 장난치고 있는 14개월 된 아이에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말할 엄두가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거실로 나왔습니다.

"사진이 몽땅 날아갔어."

거실에서 웃음 띈 얼굴로 TV를 보고 있던 눈물 많은 아내의 얼굴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굳어집니다. 그리고 눈이 벌개져서 묻습니다.

"다 날아갔어? 그러면 주원이 사진은 어떻게 해?'

해줄 말이 없었던 저는 그냥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14개월 된 주원이가 울먹이는 엄마와 망연자실한 표정의 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뒤뚱거리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저를 폭 끌어안더니 평소엔 그렇게 하자고 졸라도 하지 않겠다던 입술 뽀뽀를 해줍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이를 꼬옥 안았습니다. 작고 연약한 아이가 순간 든든하고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사진은 사라졌지만 우리 가족이 함께한 시간은 가슴속의 앨범에 고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안고 있던 아이를 살며시 놓으니 아이도, 아내도 그리고 저도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역사에 작은 떨림으로 남을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그렇게 더해졌습니다.

메모는 써서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써두고 잊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이런 메모처럼 사진을 찍어서 고이 모셔두고는 그 눈부시고 황홀한 순간을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사진을 위해 환하게 지었던 미소가 앨범과 컴퓨터의 한 구석에서 시름시름 잊혀져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웃음은 신의 선물인데, 쓰고 써도 남는 것인데, 우린 그렇게 꽃처럼 많이 웃지 못하는 군요. - 구본형

아이가 엄마, 아빠에 이어 세 번째로 배운 말이 '꽃'입니다. 신기하죠? 개나리, 진달래 다 지고 무슨 꽃이 남았겠나 싶었는데, 아이 덕에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꽃밭입니다. 꽃처럼 더 많이 웃어야겠습니다.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슴 속에 남을 역사를 위해 더 많이 웃고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소중한 것은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작은 떨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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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5.28 06:56:10 *.112.72.168
아... 글 한번 귀엽고 애틋하다.
주원이가 '구원'이가 되었네?
보고싶다 주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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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5.28 14:31:00 *.249.167.156
아버지만이 쓸 수 있는 따뜻한 글이네요. 아이가 있어 슬픔이 기쁨이 되네요!

윌 듀란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그를 바꾼 건 책과 철학자 뿐만 아니라, 그의 딸, 에델(Ethel)이더군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방긋 웃는 통통한 두 볼이, 그 새로운 생명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상의 기적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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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5.28 15:45:54 *.99.120.184
아이를 키우다보면 아이가 부모의 스승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죠.

아마 주원이도 아빠를 닮아서 사랑이 깊은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거울이거든요.
언제나 아이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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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힙
2007.05.28 16:49:27 *.109.104.163
주원이가 옆에 있는데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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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28 20:45:56 *.142.243.87
아이가 있어야 그 맘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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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5.29 09:02:40 *.227.22.57
옹박~ 주원이 보여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 연구원 모임에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말이야. ㅎㅎ 짧은 당일치기 야유회라도 함 가볼까?

도윤~ 요즘 생활의 많은 부분이 아이로 채워져 있어서일까? 아이에 대한 글을 자주 쓰게 되네. 멋진 글을 쓰려고 하기 보다 무언가에 감전되려고 하다보면 글이 쏟아질 거 같아. 연구원 시작하고, 글을 쓰다 보니 일상의 한자락도 그냥 흩어보낼 수가 없다고나 할까? 윌 듀란트 못지 않은 구선생님의 따님들 사랑도 소문이 자자하던데... 딸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어. ㅎㅎㅎ

창용형~ 형이 쓰신 아이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주원이의 몇 년 후를 상상하게 됩니다. 아이과 같이 살아가면서 이것저것 물어볼 것들이 많을 듯한 느낌입니다. ㅎㅎ 많이 도와주세요~

장미궁뎅이(?)~ 옆에 있어도 보고 싶으면, 떨어져 있는 나는 어찌 살라고? ㅎㅎ 매번 꼬박꼬박 읽어주니 고마우이~

호정~ 눈물 많은 아이 하나 벌써 키우고 계시지 않았나요? ㅎㅎ 잘 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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