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최정희
  • 조회 수 3391
  • 댓글 수 12
  • 추천 수 0
2007년 5월 29일 00시 06분 등록
오월의 하늘은 맑고 새들의 노래 소리는 대기의 신선함을 듬뿍 뿜어내고 있었다. 산을 휘감아 도는 강물은 깊고 잔잔하였으며 우리가 나누는 달콤한 언어들은 날개를 달고 날았다. 그들은 노래가되고 향기가 되어서 다시 내게로 다가와 속삭인다.
" You are my sweet pea."

오랫만의 외출이었다.
매일 일과처럼 행해지는 둘만의 아파트 등나무 아래로의 나들이를 제와 한다면 한 달도 훨씬 넘었다. 서로가 바쁘다기보다는 ‘나로 인함’이다. 대학원 논문에서 시작하여 연구원의 책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잡다한 나의 취미로 우리가 즐겨하던 도시락 싸서 나서는 둘만의 외출은 휴강 상태나 다름없었다. 생동감 있는 철학 강의에 취할 대로 취한 뚜비(그는 나를 늘 이렇게 부른다. 내 본명을 들어본지가 십 수년은 되었다.)의 한 달 30일 출근을 그는 넉넉한 미소로 지켜봐 주었다. 그의 이름은 언젠가 언급한 바 있는 남편 보라돌이다.

5월의 청명함이 한 잔의 커피 속으로 내려와 앉는다. ‘흥겨운 노동’의 프리마가 찻잔 속에서 스르르 녹아나고 텅 비운 머릿속에는 ‘벗어던짐’에서 오는 홀가분함이 자리를 잡았다.
토끼풀들이 지천이다. 하얀 꽃들이 초록의 잎들 속에서 올망졸망 어깨를 맞대고 개미를 비롯한 풀벌레 몇 마리가 그 사이를 유영한다. 따스함이 전해진다. 커피 잔에서 전해지는 것인지 그의 손길에서 오는 것이지 명확하지 않지만 느낌은 아주 좋다.

토끼풀 팔찌.
내 왼 손목을 초록과 흰색으로 살포시 감싸고 있다. 보라돌이가 뚜비에게 준 풀빛 짙은 토끼풀 팔찌에서 나는 과거의 짧고도 긴 우리들의 역사를 읽어내고 잠시 가슴 저미어 옴을 느낀다.
하늘을 올려 다 본다. 종다리 두 세 마리가 원을 그리고 토끼모양의 구름이 서쪽을 향하여 두둥실 떠가고 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 때면 사람들은 곧잘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서 위안을 찾는것인지 눈물 떨어짐을 막으려는 시도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나의 경우는 둘 다 해당된다.

사랑이야기에 관해서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특별한 사연과 가슴 저림을 간직하고 있듯이 나 또한 그 특별한 사랑을 안고 있다. 지금에야 곱게 품을 수 있지만 그 생채기의 아픔이 깊고도 슬펐기에 스스럼없이 끄집어내어 풀어 놓기에는 아직은 힘들다. 그러나 그 아픔의 보퉁이를 살짝 비집고 나오는 ‘사랑’ 이라는 것이 나를 조금은 넉넉하게 만들어 준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들 많은 집 막내다. 그리고 소위 명문이라는 고등학교, 명문 대학 졸업,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곳에 주소를 두고 있는 키 크고 잘 생긴 총각이었다. 덧붙이자면 노래도 잘했고 프로스트의 영시를 멋지게 읊을 줄도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되면 군대 행진곡 정도는 음정 박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과 손으로 연주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해할 만한 뚜렷한 이유도 없다. 돈도, 인간성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답답할 뿐이었다.
고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체제(울 엄마의 생각)를 변화 시킬 만큼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물결 속에 휘말려 떠내려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집에서는 착한 딸로서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다. 그러나 그 남자 앞에서의 엄마와의 맹세는
얼굴조차도 드러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맺고 끊음이 없던 나의 성격으로는 지극히 예견된 조류였다. 나는 나였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식구들의 고충은 기아 상태이상이었다.
그 뒤 전개는 멜로 드라마였다.
결혼식에는 한 쪽 가족만 참석했다. 내 쪽에서 신랑 체면을 차려 준 것이 있다면 친구들이 대거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네고 멋들어진 실내악 연주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다.

제1부로 끝난 드라마였다면 참으로 슬픈 드라마였을 거다. 결혼 후 십년을 넘게 그는 사위로 인정되지 아니했고 나는 단지 집나간 딸로 연출 되었으니까.

제2부는 웃으면서 볼 수 있다. 전 반 몇 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지만 나와 울 엄마는 이기고 지는 관계가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딸에게 있었던 일은 모두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것도 없었던 일, 아이를 낳고 사는 일도 없었던 일, 단지 진행되고 있었던 확실한 사실은 엄마의 모든 생활이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 유일하게 인정되어졌다. 그 분노는 현재의 삶에 대한 분노를 시작으로 해서 과거 저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거부되고 철저히 무시되는, 그로 인해 딸인 나는 죄스럽고 무서워서 엄마라고 부르지도, 뵙지도 못하고 자주 자주 떠돌 뿐이었다. 그 곳은 도피처요 망각의 장소들이었다.

그러나, 그 힘든 고통의 순간에 일어서서 울창한 밀립을 헤치고 한 발자국씩 전진할 수 있었음은 나의 사랑 보라 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언제나 영웅이었고 그는 나를 위해 기꺼이 로마의 전쟁 노예까지도 될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출세라는 커다란 욕망을 버렸고 가족으로부터 오는 결코 가볍지 않는 질타도 사뿐히 받아넘겨 버리는 정말 나에게는 과분하게 이를 데 없는 충실하고 멋진 반려자였다. 내가 좋아하는 소(牛)이야기로 기꺼이 밤을 지샐 줄도 알고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워즈워드. 릴케의 아름다운 시를 읊을 수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 절반은 유머다. 온 몸으로 웃기고 함께 웃게 만든다. 숨어서 웃기고 연기로 웃기고 말로서 웃고 또 웃게 한다. 오직 그가 나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 있다면 좀 더 무게 있는 아빠가 되어달라는 청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아빠의 열렬한 시청자요, 관객을 넘어 연기의 구성원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 것은 그가 승리했음을 뜻한다..

‘세월’이라고 불리어질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 엄마는 한 말씀 하신다.
“ 왔는가 ”
감격스럽고 황홀한 한 말씀이시다. 그 이상 바라지도 아니하거니와 더 하시지도 않는다.

딸은 알고 있다. 차마 그 긴 사연을 다 털어놓기는 뭐하지만 나의 엄마, 뚜비의 엄마가
충직하고 변함없는 보라돌이를 왜 그렇게 온몸으로 거부했는지를.

윌 듀런트는 아멘호테프를 왕이 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표현한다. 전쟁보다 예술을 더 좋아하고 아름다운 시를 썼으며 아내인 네페르티티를 지치지 않고 사랑한 그 멋진 아멘호테프를,
듀런트가 생각하는 왕의 조건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 는 없지만 그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인간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삶의 모든 것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요. 왕의 조건임이 확실한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의 보라돌이가 진정한 영웅이다. 내가 그에 의해서 영웅이 된 것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 영웅의 길을 택한 것이다.



IP *.114.56.245

프로필 이미지
송창용
2007.05.28 14:28:21 *.99.120.184
남자입장에서도 진정 영웅이라 칭할 수 있네요.
서로를 보라돌이와 뚜비라 부르며 지내시는 모습에 지금의 힘든 과정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알았습니다.
정말 진정 영웅이라 불릴 만한 든든한 후원자를 갖고 계십니다.
부럽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김도윤
2007.05.28 16:41:15 *.249.167.156
"왔는가" 그러네요. 그 말 속에 제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것들이 담겨있네요!

글이 신묘합니다. 시에서 보라돌이까지, 슬픔에서 웃음까지, 그 모든 영역과 감정들을 종횡무진 무찌르고, 거침없어 풀어 젖히는 모습이, 그 경쾌하고 발랄한 건너뜀이 제겐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자운영 꽃밭 봄나비 같기도 하고, 쪽빛 바다 싱싱한 은빛 멸치 같기도 하고^^
프로필 이미지
옹박
2007.05.28 19:47:43 *.112.72.168
아.. 최정희 선생님.
스쳐지나는 모습에서 저는 당신이 소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조용한 마음이군요.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05.28 20:50:51 *.70.72.121
처음 남해에서 뚜비님의 늦은 참석이 기억에 나요. 장례식 장면에서 어머니를 부르셨지요. 당신 사위 좋은 사람이라고...

이상형의 사람이랑은 결혼하는게 아니라던데... (부러워서 ^^ )

대학 때부터 여태까지 이어지는 제 친구는 부모님의 반대와 식장 불참에도 용감하게 신랑과 동시입장을 감행하며 결혼식을 올렸더랬죠. 저는 감히 생각도 못하는 그녀의 결정이었어요.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

또 다른 한 친구는 살면서 어려움 너무 많았지만 자신들이 선택한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기에 더 많이 참고 살았다고도 하고요.

미덕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된 능력과 감각이 함께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부는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 역사속의 영웅들 p176

아직도 바닷가 모래사장의 소년과 소녀의 소꿉놀이처럼 아름답게 삶을 가꿔가시는 순한 사랑에 감동합니다. 당신 사랑 닮고 싶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호정
2007.05.28 21:18:22 *.142.243.87
보라돌이와 뚜비.
연구원 레이스 때 칼럼에서 보았습니다.
저는 혹시 제 또래인가 했었어요.

정겹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최정희
2007.05.29 00:25:10 *.86.55.214
슈만과의 결혼을 위해 아버지와의 소송도 기꺼이 감내하는 클라라에 반하는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여인을 위해'아름다운 5월에'라는 달콤한 노래를 부를 줄 알는 슈만에게 더 끌리는 이유를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5월의 장미 향에 취하여 가던 길 멈추고 내 걸어온 길을 잠시 돌아봅니다. 저멀리 나약하지만 아직도 꿈꾸고 있는 '나'가 동그마니 서 있네요.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5.30 07:06:35 *.72.153.12
^^
사랑노래나 장미향에 취해 본게 언제인지 까마득 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7.05.31 07:07:43 *.128.229.230
그 보라돌이 보고 싶습니다. 몽골에 함께 오거나 연구원 모임에서 '내 사랑 이야기' 들려주기 바랍니다.
프로필 이미지
도명수
2007.05.31 16:22:00 *.57.36.18
최정희 선생님
처음으로 글올리니 쑥쓰럽네요.

사랑은 살면서 가꾼다는 말을 무색케합니다.
이미 잉태한 사랑을 더욱 가꾸는 모습에서
사랑의 위대한 힘을 느꼈습니다.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내일을 비추십시오.
보라돌이와 뚜비 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최정희
2007.06.01 13:16:30 *.114.56.245
네.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남해에서 뵙 던 모습, 그 멋진 솜씨로 칵테일을 만들어주시던 모습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부님 .
아웃 라인을 잡아가는 '윌든' 같은 놀이터
술이 익어가고, 이야기, 꿈, 그리고 음악과 바람을 비롯한 온갖 물상들이 함께 쉬었다 가는 그러한 쉼터 를 만들어 모시겠습니다. 장미가 가고 나니 모란이 또 오네요. 향이 참 좋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7.06.02 06:29:59 *.109.236.127
글에서 향기가 나네요~
저도 한번 뵙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정희 선생님 잘 계시죠??남해 이후로 못 뵌거 같은데...^^
프로필 이미지
정희근
2007.06.20 09:20:23 *.124.218.100
샬롬!
저는 너무 부족한 남편이라서 아버지학교란델 수료했답니다.
제 아내 왈 "6개월 효과" 그래도 상당히 길었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이 아침에 눈물 흘릴뻔 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아니 아름답습니다.
"슈만과 클라라" 경주에 이 이름을 가진 커피숍이 있는데, 거의 2년만에 어제 들렀었는데, 그 이름을 여기에서 보게 되는것은 ....
너무 멋진 분들 이십니다.
"보라돌이와 뚜비"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032 [컬럼011] 가슴 속의 역사, 소중한 떨림 [6] 香山 신종윤 2007.05.28 3413
5031 변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변하면 안 되는 것 [5] 해정 오윤 2007.05.28 3827
5030 (011) 그 시절의 영웅들 [3] 교정 한정화 2007.05.28 3085
5029 (11) 젊은 성공의 다른 쪽에는 [5] 박승오 2007.05.28 4355
5028 (칼럼10) 폭신폭신한 나의 영웅 [10] 素賢소라 2007.05.28 3406
» 나의 아멘호테프 [12] 최정희 2007.05.29 3391
5026 [11]우리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 [2] 써니 2007.05.29 3460
5025 [10] 부자 교회 앞 거지와 이방의 신 [6] 써니 2007.05.29 3601
5024 독서를 지속해야 하는 3가지 이유 [3] 현운 이희석 2007.05.29 3980
5023 인류와 나, 우리들의 과거 속 빛나는 장면들 [4] 海瀞 오윤 2007.06.03 3212
5022 [컬럼012] 경이로운 떨림의 장면들 [3] 香山 신종윤 2007.06.04 3119
5021 떨림, 그 긴 여운 (칼럼12) [3] 최정희 2007.06.04 2783
5020 (12) 역사 속의 반짝이는 물결 조각들 [4] 時田 김도윤 2007.06.04 2997
5019 (칼럼11) 가슴으로 다시 만난 역사 [7] 素賢소라 2007.06.04 2990
5018 (12) 역사는 예(example)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 [6] 박승오 2007.06.04 3107
5017 [12] 칼럼이 아닌 내면의 토의와 탐색 [4] 써니 2007.06.04 2675
5016 나에게 가장 경이로운 역사의 5가지 장면 [3] 현운 이희석 2007.06.05 3199
5015 [칼럼12]역사와 함깨한 5월을 보내며 [6] 素田최영훈 2007.06.05 2931
5014 (13) 실컷 울어라! [5] 時田 김도윤 2007.06.07 3434
5013 [칼럼13] 기본으로 돌아가자 [4] 余海 송창용 2007.06.08 3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