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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5일 13시 33분 등록
■ 인류의 역사 중에서 나에게 가장 경이로운 떨림으로 다가온 장면 5가지

가장 경이로운 떨림의 기준을 ‘눈물’로 삼으니 쉽게 4가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조선의 충신 사육신과 예수라는 인물, 그리고 3․1운동과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2가지 사건이 그것입니다. 예수를 제외하면 나머지 3개의 장면이 비슷하여 3․1운동과 광주민주화항쟁을 하나로 묶어 3개의 장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개의 장면은 AD 96년부터 180년까지 현명한 왕들이 구가한 팍스 로마나 시기와 중세 시대 지식인들이 보여준 믿음의 변화 장면을 꼽았습니다. 간단하게 사건을 묘사하고 짧은 제 견해를 덧붙이는 식으로 적어봅니다. 왠지 사육신에 대한 얘기만큼은 길어질지도 모르겠네요. ^^

1. 사육신 그리고 신숙주의 부인 윤씨와 하위지의 아들

조선의 4대 왕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이 세종의 뒤를 이은 5대 문종이고, 둘째는 7대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다. 그런데,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왕위를 지킬 수 있을지 몰랐다. 세종은 영특한 어린 세손을 특별히 귀여워하였는데, 기질이 사납고 웅장한 뜻을 가진 수양대군을 비롯한 아들들이 버티고 있기에 혹여라도 문종이 일찍 세상을 뜨게 되면 훗날이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세손을 폼에 안고 귀여워하던 세종이 집현전 뜰 앞을 거닐다가 그 자리에 있던 성삼문, 신숙주 등의 젊은 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경들에게 부탁할 말이 있고. 이 아이는 골격이 빼어나고 지혜가 총명하여 가히 쓸 만한 성품이므로, 특히 경들에게 당부하는 터이니 부디 경들은 후일 나의 오늘 이 부탁을 져버리지 말아 주오.”

그 순간 용안에는 웃음빛이 걷히고, 엄숙하고도 추연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젊은 학사들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신 등이 어찌 잊겠사오리까. 힘과 마음을 기울여 성상의 크나큰 은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이 중에서도 성삼문 같은 이는 너무도 황송하여 감격하여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름 모를 병으로 재위 1년 만에 아버지인 세종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세종이 그토록 귀여워하던 원손이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로 문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6대 단종이 된다.

그러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강권 정치를 해 나가게 된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던 날, 박팽년은 그날 당직으로서 이 광경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경회루 앞 연못에 빠져 죽으려다 성삼문의 만류에 눈물을 거두고 사례하였다.
이후 이들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김질의 7명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걸었다.

거사 당일. 이들의 계획은 한명회의 눈치 빠른 수완으로 물거품이 되고, 이에 일이 여의치 않은 것을 보고 눈물의 결의를 버리고 김질이 거사 계획을 한명회에게 찾아가 낱낱이 고하고, 한명회는 세조에게 모든 것을 그대로 전하였다.

이튿날 세조는 먼저 성삼문을 불러들였다. “네가 여섯 사람과 공모하여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게 사실이냐?” 김질의 변절을 직감한 성삼문은 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성승지의(성삼문은 예방승지였다)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상문을 하옥케 하고, 나머지 다섯을 모두 잡아들였다. 그리고 친히 국문을 시작하였다.

“네가 나의 녹을 먹으면서 어찌 나를 배반하고 역적모의를 했느냐?”
세조의 물음에 성승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하였다.

“나는 상왕의 신하로서 상왕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것이오. 내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닌 바에야 어찌 배반이니 역적이니 한단 말이오. 내 상왕을 멀리 떠나서는 일을 도모할 수 없겠기로 벼슬을 붙들고 있었거니와, 그러나 나으리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면 알 것이오. 나는 상왕을 위하여 죽을 뿐이니 어서 죽여주오.”

크게 노한 세조는 형리로 하여금 쇠를 불에 달구어 삼문을 고문하니 살이 튀고 힘줄이 탔다. 삼문은 안색을 변치 않고 말하였다. “나으리의 형벌이 너무 참혹하외다. 아무리 해도 굴복할 내가 아니니 곧 죽여줌이 어떻소.”

그리고 세조를 쏘아보는데, 세조의 곁에 신숙주가 있음을 본 그가 한껏 소리 높여 숙주를 질타했다. “네 이놈 숙주야! 너는 선대왕(세종)의 옛 당부와 문종의 고명을 잊었느냐? 네가 이처럼 비겁할 줄은 몰랐구나! 네 장차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왕들을 뵈오려느냐?”

무안해진 숙주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그의 부인 윤씨는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눈초리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오늘 성승지, 유대감 등이 국문을 당한다 하기로, 필경 당신도 그들과 함께 순결하시려니 생각했는데, 이 어이된 일이오니까? 이제 첩은 당신의 뒤를 따를 양으로 죽을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중이온데, 어찌하여 그냥 나오시나이까?”

숙주는 어린 자식들을 가리키며 “저것들 때문에...” 라고 말했다. 윤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니 무엇이오? 당신의 그 명망이 가석하외다. 에이 더럽소!”
하고는 숙주의 얼굴에 침을 뱉고 총총히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뒤 숙주가 따라 들어가 보니 부인은 들보에 목을 맨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박팽년, 유성원, 이개, 하위지, 유응부 모두 성삼문과 같은 기개와 선대왕을 향한 충성심으로 세조의 국문에도 꿋꿋이 절개를 지켰다. 그들은 그렇게 죽었고 후세는 그들을 ‘사육신’이라 불렀다.

그중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열여섯 살이고 둘째는 열 네 살이었다. 금부도사가 와서 그들을 잡아채자, 두 아들은 모친 앞에 꿇어 엎드려,
“아버지께서 극형을 당하시는데, 어찌 자식이 살기를 바라오리까. 이제 어머님을 영결하는 터이오니, 어머님 부디 슬픔을 억제하시고 출가치 못한 누이와 함께 관비가 될 것이오나 부도를 지켜 의롭게 살아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리고 두 번 절한 다음 형리를 따라서 조용히 형틀에 올라 아버지를 따랐다.
[본 글은 청아출판사의 『이야기 조선왕조사』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습니다.]

*

2일 오전에 『이야기 조선왕조사』의 사육신이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서도 많이 울었는데, 3일 저녁 이 글을 쓰면서도 3번이나 온 몸에 전율이 감돌았다. 역시 이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울거나 감동하거나 전율한다. 나에게 떨림의 역사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면이다. 물론 나는 학문의 영역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신숙주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충성을 다한 6명의 선비에게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기개를 본받고 싶다.

한 연구원이 과거의 경이로운 장면 중 살아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어느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 주어진 질문이 아니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사육신”이라고 혼잣말로 답했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면, 세조 앞에서 성삼문 등과 함께 단근질을 당하였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나 역시도 궁금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의 소망이 그들처럼 죽고 싶다는 것이다.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말이다. 내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염원을 담은 마음인지, 정말 내 안에 그런 용기와 정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잘 죽고 싶다. 잘 보낸 하루가 잠자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처럼, 잘 살아낸 일생이 죽음의 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오늘 하루에 대한 조금은 의연한 결의가 생긴다. 잘 살아가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분명히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죽지 않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나의 하루를 바쳐 무언가에 전심과 전력을 다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 할 일을 다하기 전에는 나는 죽지 않을 것이고, 내가 만일 죽는다면 내가 이 땅에서의 할 일을 다하고 난 후일 것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의연하게 이 땅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침에 상쾌하게 집을 떠나 출근하듯이, 어느 날 희망차게 세상을 떠나 그렇게 가고 싶다. 갑작스럽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말이다. 하하하. 역시 나는 아직 어린가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하지만,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꼭 그 수(壽)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나는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의 이상론이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실천론을 고민한 셈이다.


2. 3․1절과 광주 민주화 운동

“국권을 강탈당한 후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자결주의와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1919.3.1) 이에 서울과 지방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족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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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사교과서를 읽다가 울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3․1운동에 관한 부분을 읽고 있는데, 3․1 운동이 일본에 있던 우리나라 유학생들로부터 발단되었다는 설명을 읽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먼 타향으로 간 그들이 나라를 잃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결연히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순간, 짝궁에게 들켜서(?) 왜 그러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나는 3․1 운동의 도화선을 일으킨 일본 유학생들의 의분 때문이라는 설명을 했지만, 그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고, 나의 울음은 그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 때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데, 아주 가끔씩 삼일운동으로(?) 나를 놀리곤 한다.

몇 년 전, 나는 국사 교과서를 구입했다. 내가 공부했을 때보다 판형이 크고 칼라 사진도 많다. 이 교과서에서 3․1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위에 옮긴 구절이다. 분명히 3․1운동이 민족 자결주의와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었다고 국사 교과서는 밝히고 있다.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문제 해결을 위하여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원칙이고, 2․8 독립 선언은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도쿄에서 2월 8일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인 운동이다.
오늘 또 한 번 이 교과서를 꺼내어 읽었는데 다행히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얘들아, 나 이제 국사 교과서 읽어도 안 울어~!


3. 예수의 십자가 처형

여러 증거에 가장 부합한 현대식 날짜로 기원 후 30년 4월 7일 금요일, 햇볕은 벌써부터 따가웠다. 병영에서는 군병들이 그날 선고된 세 건의 십자가형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한은 마지막까지 예수의 곁을 지킬 각오로 밖에서 기다렸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자기네 희생물이 고생하는 모양을 보려고 기다렸다.

요한은 네 집행 요원들과 함께 햇빛 속으로 나오는 예수를 보았다. 옷은 본래의 옷이었으나 가시관은 아무도 벗기지 않을 채였다. 어깨에 들린 묵중한 나무 때문에 채찍 맞은 자리가 쓸려 빗겨졌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데다 피까지 흘려 기력이 없는 그의 몸은 나무에 짓눌렸다. 얼마 가지 못하여 는 휘청거리다 길 위에 쓰러졌다. 마리아는 아무리 참혹한 광경일지라도 끝까지 담담히 아들 곁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베드로는 창피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나 먼 훗날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고백했으니 혼자 생각하고 눈물지으며 멀리서 아무도 모르게 보았을 것이다. 나머지 열 두 제자는 혹 이때쯤 정신을 가다듬었을지 모르나 기록에는 아무데도 없다. 유다는 이미 자살했다.

행렬은 바위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곳에서 멈추었는데 그 윤곽이 아람어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인 해골이라는 이름에 꼭 맞았다. 참수형은 비교적 고통이 없고 신속하지만 십자가형은 느리고 말 그대로 고통 자체였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과 수치도 형벌의 일부인지라 할례 받은 유대인들은 나체를 질색했고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부분에 절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칠 수 없었다.

이어 그들은 예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죄수들이 운명을 벗어나려고 마지막 발악을 할 수도 있었으므로 군병들은 절대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등이 찢기고 까졌든 그의 머리에 가시가 둘렸든 그들은 알 바 아니었다. 두 병사가 예수의 팔을 쫙 벌리고 세 번째 병사가 팔 밑에 가로대를 밀어 넣자 마지막 병사가 그의 무릎을 꽉 눌렀다. 한 군병이 대못과 망치를 꺼내 예수의 한쪽 팔 앞에 무릎을 꿇고는 못을 손바닥 위에 댔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못을 탕탕 내려쳐 가로대에 박았다.

병사 뒤쪽으로 두 강도는 못이 박히면서 비명과 저주와 욕설을 쏟아냈으나 예수는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라 기도했다. 손발의 못 구멍에서 흐르는 피는 엉겨 붙기 시작했다가도 예수가 숨을 쉬려고 들썩일 때마다 다시 흐르곤 했다. 꿈쩍도 할 수 없어 저릿저릿 저려오는 팔다리, 곪아 들어가는 채찍과 가시와 못의 상처, 매정한 땡볕, 충격으로 벌써부터 타들어가는 갈증, 그 참혹한 고통을 요한은 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정오에 또 다른 공포가 엄습했다. 어둠이 온 땅을 덮은 것이다. 그날이 보름이었으니 일식은 아니었다. 지진을 앞두고 빛이 흐려지는 기현상도 약간 작용했을 수도 있으나 물리적 원인과 규모야 어찌되었든 때 아닌 흑암은 조롱하던 자들을 침묵케 했고 마리아와 요한의 고뇌를 더하게 했다. 이는 순교자의 기쁜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는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비탄은 차마 보기에도 두려웠다. 흑암에 휩싸인 세 시간이 흐른 후 예수가 갑자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크고 또렷한 소리로 처절하게 절규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몇 분 더 시간이 흘렀다. 한창 나이의 남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는 사흘이 걸릴 수도 있는데, 예수는 이미 때가 된 듯 짧은 숨을 헐떡였다. 요한은 차마 볼 수 없었고, 어찌나 가슴이 찢어지던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명설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노라.”

갑자기 예수의 포기의 어조가 아닌 승리의 어조로 또 한 번 외쳤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요한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가 가시관을 쓴 고개를 가만히 떨어뜨렸다. 그때부터 그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진이 그치면서 어둠도 걷혔다. 사형 집행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로마 백부장이 예수의 시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본 글은 존 폴락이 쓴 『하룻밤에 읽는 예수의 생애』에서 부분 인용하였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나는 요한복음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나는 아직 진정으로 회심을 하기 전이었고, 성경말씀이 나의 이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믿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미 가족을 버려두고 나를 쫓으라고 말한 예수의 말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지만, 사람들이 성경, 성경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계속 읽고 있던 중이었다. 말하자면, ‘구원’이 아닌 ‘구도’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던 중이었다.

요한복음 19장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고 돌아가신 내용을 다루었는데, 내가 예수의 죽음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국사 교과서의 건조체도 말리지 못한 나의 눈물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예수 죽음 이후의 부활까지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내가 회심을 하게 된 것이다. 세계관이 바뀌고 믿고 있던 신념이 바뀐 발단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나에게 떨림을 준 장면에서 영원히 빠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하룻밤에 읽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 장면만 다시 읽었다. 눈물을 글썽였음은 물론이다. 오늘 밤을 새워가며 예수의 생애를 모두 읽어보고 싶은 날이다.


4. 철학자 왕들이 구가한 팍스 로마나

누구든 세계 역사에서 인류의 조건이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대를 꼽으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아마도 지체 없이 네르바 황제의 등극(96년)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년)까지의 시대를 꼽을 것이다. 이 황제들의 통치 기간은 아마도 대규모 국민의 행복이 통치의 확고한 목적이 되었던 유일한 시대일 것이다. (윌 듀란트의 『역사 속의 영웅들』, p.226)

*

나는 훗날 훌륭한 리더가 되고 싶다. 올바른 방향을 알고,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비전을 공유하여 나의 이름이 아닌 조직의 이름으로 멋진 성과를 달성해 내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 함께 깨닫고, 함께 일어나서, 함께 걸어가고 싶다. 나와 함께 조직 생활을 한 사람들과 함께 번성하고 싶다.

훌륭한 리더를 갈망하는 나로서는, 국민들에게 평화의 시대를 선사한 훌륭한 왕들의 얘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에드워드 기번은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기 중의 하나로 로마 이 다섯 황제들의 시대를 꼽았다. 12대 황제 네르바부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약 85년 정도의 기간이다. 기번의 이 견해에 에르네스트 르낭이 동의하였고, 윌 듀란트도 간접적으로 동의한 듯하다. 연구원 후의 과제가 또 하나 생겨서 즐겁다. 연구원 1년을 마치고 나면, ‘세계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통치자들의 연속’이 이어진 이 시대를 진지하게 들여다봐야겠다.


5. 중세 믿음의 약화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모든 것을 걸었다. 로마 문명은 그 신들의 죽음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교회가 야만인을 가르쳐 문명인으로 만든다고 여겨서 좋아하였다. 또한 순결과 기사도를 북돋우고, 일부 전사들을 신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가 널리 퍼지고 부유해지면서 강해졌다. 또한 세속적 영향력을 높인 것과, 파괴적인 개인주의와 정치적 술수와 회의적 지성에 의해 약해졌다. 교회는 화려함과 영향력을 놓고 대성당들과 힘을 겨루는 대학의 발전에 역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교회는 대부분의 교사들을 공급하고 훈련시켰으며, 종교의 의상으로 그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u)점차 이들 선생들은 믿음과 종교적 경력보다는 지식과 세속적 출세를 추구하게 되었다. 고전 문서들을 함께 탐구하고 보존하고 편집하던 성직자와 속인들은 고전 문학과 철학의 매력과 깊이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 더 큰 열성으로 플라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두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두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u) 그들을 통해 문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세의 역사적 업적은 완성되었다.
그 죽음이 곧 그 완성이었다. (윌 듀란트의 『역사 속의 영웅들』, p.274~275)

*

교회 청년부에 다닐 때에는 따를 만한 믿음의 선배들이 많았다. 내가 총무였을 때, 나보다 3살 위의 형이 회장이었는데 그는 정말 리더십이 있었다. 그가 계획하고 지휘하는 머리였다면 나는 그의 실행을 돕는 손발이었다. 아니, 손발이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당시 내가 할 일은 회장에 대한 순종이었다. 가끔은 창조적이면서도 유쾌한 딴지를 걸어 그의 머리를 더욱 불꽃 튀도록 하는 것도 멋진 도움이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형이 말하면, “네 한번 해 보겠습니다”의 스타일이 더 잘 어울렸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작년 오사카로 떠나는 단기선교 때에도 나는 총무였고, 회장 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들이 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나 행동을 실시하는 나를 보며 놀라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를 통해, 나는 팔로워십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리더들을 잘 따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20대 중, 후반이 되면서 그렇게 믿던 선배들도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하는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순수한 믿음과 거룩한 열정은 하나 둘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은 예전과 비슷했지만, 행동은 점점 달라지고 있었고, 몇 년이 더 지나고 난 후에는 그들의 말도 패배자의 슬픈 언어로 바뀌었다.

믿음과 종교적 경력보다는 지식과 세속적 출세를 추구하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것보다 더 큰 열성으로 플라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중세의 선생님들의 얘기를 읽으면서, 21세기의 청년 크리스천들도 중년으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21세기를 넘어서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비단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원대한 비전을 현실주의와 맞바꾸면서 스스로를 자위하는 선배들이 떠오른다. 비전을 성취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전이 원대할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녹록치 않다. 하지만, 오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일이면 뭔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선생님의 말처럼 거짓 희망에 불과하다. 비전은 큰 날개를 다는 것과 같다. 우리의 체중은 무거워지겠지만,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비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전 날개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절대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지만, 관용을 잃어 상대주의 시대에 편협한 지식인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한 손에는 절대주의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관용을 잡았다. 이 관용은 절대주의를 흐리게 만들거나 나의 신념을 비겁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이 비진리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는 도구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믿음과 종교적 체험이다. 지식과 출세는 그 다음이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이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 우선순위를 놓치지 말자. 나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걸었던 길, 그리고 나의 믿음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 그 길보다 조금 더 거룩하고 열정적인 길을 걷고 싶다.


글을 맺으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슴 떨림을 안겨다 주었던 장면을 찾는 일은 곧 나를 찾는 일임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글을 적으면서 내가 왜 이 장면을 꼽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하여 가슴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 장면 속에는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이 숨어있기도 했고, 나의 믿음과 비전이 담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재의 나에 대한 불만을 발견하도록 도와 준 장면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내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되면 달라질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또 다른 크나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에도 달라질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좁은 인식의 지평이 지금보다 더욱 넓어졌을 때에는 나를 더욱 잘 보여주는 장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 역사 공부의 효용과 유익을 말한 현인들의 말이 백번 옳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몰려옵니다. 이 깨달음이 공부의 즐거움인가 봅니다. 하하하. 한 번 웃고 이만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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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04 12:12:46 *.72.153.12
이제 그만 죽자. 살아가는 일에, 살아 남는 것에 더 몰두해 보자.
누구를 위해 아름답게, 이상적이게 죽을 것인가는 이제 그만하고,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 더 치열하게 살아보자.

내 경우엔 남동생이 허망하게 죽고, 죽음이 이상하게 가까이 와 있음을 알았고, 사랑하는 쌀집오빠가 죽고, 죽음이란 것이 더없이 미웠다. 나의 과거에서 죽음은 무기력을 낳았다. 늘 한쪽 편에서 나를 따라다녔지만 나는 애써 죽음을 외면했다. 난 단지 무기력할 뿐이었다.

나는 남해에서도 밝혔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안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일 거다. 성삼문처럼 죽을래, 신숙주처럼 살래라고 나에겐 묻지마라. 나는 그런 물음을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혹시 그런 질문 받는다 해도, 나는 그냥 살고 싶을 뿐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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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04 13:53:34 *.99.120.184
글도 좋지만 말이 더 좋은 너에게
몸은 말랐지만 마음은 살 찐 너에게
마음은 여리지만 행동은 강한 너에게
삶도 사랑하지만 죽음도 사랑하는 너에게
애정과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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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6.06 22:57:15 *.134.133.46
정화누나. 솔직한 누나의 글에서 뭔가 슬픔 비슷한 걸 느끼게 되네요. 그랬군요. 누나의 주변엔 '죽음'이 많았네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고등학교때 독서실 단짝 친구... 그런데, 사람은 모두 달라요. 그쵸?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도 누나와 나는 조금은 달라 보이니까요. ^^ 달라서 좋아요.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저도 죽고 싶지는 않지요. 다만, 의미있는 삶을 통하여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랍니다. 실은,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의 이상론이 아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실천론을 고민한 것이죠. 그날, 누나랑 얘기를 좀 나눴어야 했는데. 그죠? ^

창용형. 과찬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애정에 감사하고 '존경'이라는 단어에 부끄러워집니다. 형 말대로 저는 제 삶을 참 사랑하는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의 삶까지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계속 격려해 주시고 조언해 주세요. 고마워요.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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