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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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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일 15시 26분 등록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좋은 줄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관찰하고 분석하는 기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 이 사람은 참 머리가 좋구나. 가방끈은 짧은데 어떤 먹물하고의 대화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천부적인 감각과 강단이 있어. 얘는 멀쩡한 환경에서 성장해놓고  뭐가 이렇게 맨날 불안한 거지?

우~~ 이 허풍쟁이! 소시민! 불여우!^^


나는 사람을 관찰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가까이 다가가 부여안고 친밀감을 나누는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워낙 혼자 잘 놀아서 불편한 적도 없었구요. 그러던 내가 확실하게 변한 기점으로 2009년을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이들면서 완만하게 변해 온 것도 있을 꺼구요, 성장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훈련을 받은 것도 있을 겁니다. 아들은 나와 아주 기질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성이 달라서인지 미주알고주알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근데 딸과는 아니더라구요. 딸은 나와 180도 다른 기질을 가진데다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살짝 불안할 때도 있고 내면에 분노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질을 형성하게 된 데는 내 탓이 큽니다. 어려서 나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고, 부모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말이지요.


나는 도저히 계산빨이 안 서는 낭만주의자인데 딸은 자기 표현으로 ‘치사할 정도로 돈계산이 빠른’ 스타일입니다. 그런 스타일을 가지고 나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딸과는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칠 때가 많습니다.  화를 내고 냉전으로 돌입하는가 하면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반복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은 어떤 관계에나 비슷하다는 것을요.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에 안 맞으면 숱한 사람을 자르면서 살아왔지만 아이들을 잘라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난 니가 필요해’ 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관계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니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더라도 난 너를 잘라내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이제까지는 누구에게도 ‘니가 필요해’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을 치사하다고 생각했었지요.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 버리면 되었구요. 그런데 세월과 아이들이 맞물리며 변화가 왔습니다. 사람이 필요없을 정도로 강한 인간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사소한 실수나 아집, 사람에 대한 기호나 자존심 따위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것 입니다. 기다림과 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연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속도의 문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단순한 나는 늘 주제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지요. 예의 차리고 사교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곤 했었지요.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그 자리에 그런 화제가 어울리는지 보다 늘 내 마음이 중요했으니까요. 참 민망할 정도로 취약한 관계지능입니다. 이제는 자주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왜 여기 모였을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없을까.  급하게 서둘지도 않습니다. 한 번 두 번 만남이 쌓이면서 서로 익숙해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고운 정만으로는 못 산다지 않습니까!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아주 관심을 끊어버리지는 말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고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립서비스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말습관이 진심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오는 거지요. 그 때부터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기다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타고난 관찰기질을 어쩔 수 없으므로 여전히 보이기는 합니다.^^ 외모에 비해 상당히 센서티브하므로 느끼기도 잘 합니다.

어떤 사람의 무심한 표정, 음색, 표현과 반응, 과장과 결핍을 예민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전처럼 즉각 '좋다, 나쁘다'로 나누어 판단해 버리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살아온 하나의 소우주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소중한 자질이기도 하구요. 이제는 하나도 급할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호의가 오갔다고 친밀감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고, 조금 소홀한 대접을 받은듯해도 팔딱거리지 않습니다. 어떤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게 이 사람이 필요한가? 지금의 내게 이 모임이 위안이 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거기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구요.






IP *.108.48.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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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16:00:18 *.249.57.213
지금까지 읽었던 선배님의 글 중에서 걸치고 있는 옷이 가장 가벼운 글입니다.
선배님은 독자들의 내면 세계를 건드릴 수 있는 작가가 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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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02 18:13:08 *.108.48.236
연구원 할 때는 '나'를 드러내는 글을 많이도 썼어요.
지금은 우리 사이트 대부분의 독자가 '조카님' 연배라는 사실이 걸려서
속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되었지만요. ^^
ㅎㅎ 정현씨의 과분한 추임새에 좋아서 헤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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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11.02 21:05:01 *.126.231.227
잔잔한 물결이 제 발끝을 조금씩 적셔오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기에는 제가 부족하지만
물결만은 저도 즐겨볼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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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02 23:57:25 *.108.48.236
햐! 기가 막힌 표현이네.
혁산이 시인이구먼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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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11.02 21:53:48 *.12.20.58
심경의 미묘한 울림을 아주 단아하게 잘 그려내시는군요.
명석 선배님. 갠적으로  많은 얘기 나누진 못했지만( 저는 그런 곳에 가면 스스로 흥에 겨워 혼자 노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때마다 비는 또 왜 나를 기다렸다 와 주는지...)함께 토론하며 웃고 떠들어서 참 좋았습니다. 
프로젝트하며 같이 좋은 시간 많이 보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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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03 00:00:53 *.108.48.236
바비큐할 때 술을 많이 마셔서 졸립기도 했지만
과묵한<?> 나로서는 그 때 떠든 것 만으로
1박2일치를 다 써 버렸던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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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
2009.11.09 00:19:30 *.71.76.251
제게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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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11.09 09:24:11 *.108.48.236
예전에는 '필요'라는 말이 상당히 저급하고 목적성을 가진 것 같이
느껴져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요즘 생각으로는
'필요'가 상당히 투명하고 솔직하고 실용적인 용어가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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