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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6일 11시 44분 등록

지난주 어느 날 아침 새벽 네 시 반. 배 양 옆을 뚫고 나갈 듯한 강한 태동에 잠을 깬 나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과 이상한 기분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고야 말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시는 사부님과 선배 동료 분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혈압이 낮아 아침에 유독 정신을 못 차리는 나에게 네 시 반 기상은 정상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일년에 한 번 정도. 이렇게 새벽에 벌떡 일어날 때가 있다. 최근에는 그 패턴이 더 명확해진 것도 같다. 지난해에는 엄마 집에 내려간 제주도에서였다. 곤히 자는 엄마를 깨워 새벽 산행을 하고야 말았다. 답답함을 어떻게 이길 수 없었다. 고민이 묵고 묵어 어떤 형태로 표출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찰스 핸디 할아버지였을까?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어!’라는 다짐과 함께 나를 일어나게 한 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그토록 원하던 아기를 갖고, 자의로 잠시 일하는 걸 미룬 채 돈 걱정도 없이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꿈꾸던 완벽한 상황 아닌가? 뭐가 문제인 거지?

 

일어나 보았다. 컴퓨터를 켰다. 정리되지 않은 파일들이 바탕화면을 집어삼킬 듯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을 돌려 공부방을 둘러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책장에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한때 지나친 정리벽을 가졌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몇 달 동안, 내 삶은 이렇게 방치되어 있었던가? 폴더를 만들어 파일을 정리하고 종류별로 책장을 정리했다. 이렇게 금세 처리될 거였는데, 왜 이 상태로 두었을까? 이상하게도 몸에서는 힘이 퐁퐁 솟구쳤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꾸준히 해왔던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임산부요가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그 동안 소홀히 했던 명상과 기도의 시간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초반엔 몸이 힘들어 주일미사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었는데 어느새 성당에 다시 꼬박 나간다. 이런 성찰의 시간이 늘어나서일까? 나의 변화, 자각은 말이다.

 

새 생명을 만나는 것은 분명 기대되고 설레는 일이지만, 그 이후 시간을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하기도 했다. 아이 돌볼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도 멋진 커리어를 집어 던진 그 언니들처럼, 그렇게 몇 년 간의 시간을 암흑기로 남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도 같다. 원하면 당장 나가서 배우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될 그 시간들이 두려워, 나는 조급하게 이것저것을 알아보았다. 나의 공백기를 알차게 채워줄 무언가를 공부하기 위해서. 예전의 나다운 습관이었다. 하나를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이것저것 벌이는 것. 하지만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한 가지, 연구원 후반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는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보다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나는 안다. 가끔씩 이렇게 외부에서 보기엔 평온한 상태일 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지금의 나를 남들과 조금은 다르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감사한다. 하지만 성급함이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에는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 아등바등 매달렸던 걸 한 번 놓고 지켜보아야겠다. 찰스 핸디, 피터 드러커의 인생을 생각할 때, 30대 초반의 이 날은 반전의 기회가 아직 많으므로.

 

이 찰스 핸디 할아버지가 제시한 대로, 나의 포트폴리오 인생을 한 번 구상해보아야겠다. 아기가 도와줄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면 괜히 뱃속에서 좋아하는 것 같은 아이가 이 못난 엄마에게 더 큰 것을 가르쳐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내가 그만한 그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다른 길을 걸어와 커다란 족적을 남긴 피터 드러커와 찰스 핸디의 다름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찰스 핸디는 최근 국내에 다시 출간된 <비이성의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일찍이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요지는 이성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세상에 맞추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을 스스로에게 맞추려 하므로 모든 변화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비이성적인 여자라는 존재를. 영어에서 사람은 흔히 남자를 가리키니까.” (비이성의 시대, 17페이지)

 

어쩌면 이 시대 여성들의 고민,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지켜가는 방법, 그 해답이 없어 보이는 갑갑한 문제에 내가 비이성으로 어떤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한 예를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비이성에 집중하자. 대담한 상상력과 그럴법하지 않은 사고와 비이성적인 행동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 것이다. 거기에 지침이 되는 찰스 핸디의 책들은 옆에 바짝 끼고서.

 

 

 

*이번 달에도 한 달 동안 파고들었던 경영사상가 세 사람에 대한 비교분석을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피터 드러커와 찰스 핸디, 그리고 게리 해멀 이 세 사람은 공통점도, 차이점도 있었지만 한 범주 안에 넣어 돌리기에는 너무 거대한 사람들이었기에. 대신 나는 그들의 삶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언젠가 위대한 사상가들에 대한 칼럼을 내 멋대로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IP *.71.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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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야
2009.10.26 12:12:25 *.12.21.60
찰스 핸디가 말하는 '비이성적'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까 궁금하다. 나도 이 책 꼭 읽어봐야겠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 '비이성'이라는 말이 너무나 이성적이라는 생각에 든다. ㅋㅋ

아인아. 너의 지혜로움이라면 아이도 잘 키우면서 너의 발전도 도모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환절기 건강 조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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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10.26 15:33:42 *.126.231.227
멋지다! 비이성적 여성~!
이 시대의 여성들의 고민을 품고, 새로운 창조적 대안을  찾아내겠다는 꿈
늘 현실속에서 어려움을 보듬어 안으려는 아인이의 모습이 느껴진다.
꼭 여성들의 고민을 너로써 풀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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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9.10.29 06:17:42 *.160.33.244

   언젠가 나는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은 적이 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 날 나는 바다를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고기가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 서기도 했다.     그건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체가 아니다.  아이의 신비함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아이가 책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우주를 만나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우주와 매일 대면하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두어라.  네가 너를 아직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친 벽이 높기 때문이다.   너를 다 풀어 두어야  네가 가진 장점을 다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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