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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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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일 11시 19분 등록
자본과 노동 1

이 내용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정승일님과 장하준님의 토론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수량적 유연성과 기능적 유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수량적 유연성 : 자본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
기능적 유연성 : 노동자가 여러 가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다기능화 혹은 숙련화시킨 정도를 가르키는 개념
이 중 기능적 유연성은 현대자동차를 비유하면 노동자들에게 소나타 만드는 기능만 체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랜저, 아반떼, 산타페까지 모두 제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동차 시장에서 소나타 수요가 떨어지면 소나타 라인의 노동자를 해고하기 보다는 산타페 라인으로 전환 배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나 기능적 유연성이 낮고 수량적 유연성만 높은 경우엔 ‘소나타 수요 저하’라는 시장 변화에 자본은 소나타 라인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산타페 생산 기능을 가진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하는 식으로 대처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노동 시장 유연성이란 용어를 단지 수량적 유연성에만 제한해서 사용해 온 것 같다. 이 점은 보수나 진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노동시장에서 ‘수량적 유연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기능적 유연성’이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노동 시장이 수량적 유연성 측면에서 상당히 경직된 시장, 즉 노동자를 함부로 자를 수 없는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국제 경쟁에서 뒤지지 않는 나라인데, 그 비결 중 하나가 바로 기능적 유연성에 있다. 일본 기업들은 내부 교육 시스템을 통해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기능(다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준다. 때문에 시장의 수요가 변화해 현재와 다르거나 더욱 개량된 제품을 생산해야 할 때 기존의 노동자들을 생산 라인만 바꿔서 그대로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자를 필요가 없다.
이런 노동 시장의 기능적 유연성이 일본에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수량적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즉 일자리가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에게 투자할 인센티브가 생기고, 노동자도 그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려는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다. 그에 비해 한국의 노동 사장 유연화는 수량적 유연성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 아니냐. 결국 로우-로드 전략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Low-Road 전략 : 기업 및 국민 경제는 저임금, 노동 시장의 수량적 유연화 등을 통해 비숙련 노동자로 하여금 저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국제 시장에서는 저가격으로 승부한다.
High-Road 전략 : 기업 및 국민 경제는 고용 안정과 노사 신뢰에 기반해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숙련 기술을 익혀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기를 기대한다.
일반적으로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은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거둬 주주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서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거두는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들을 줄여서 인건비를 삭감하는 것이다.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은 Low-Road 전략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 한국에 수용되고 있는 노사관계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에 해당된다. 그에 반해 노사 화합과 노동자의 숙련 축적을 중시하는 High-Road는 독일과 일본의 발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과 독일의 섬유 산업이다. 영국은 섬유 산업의 발상지인데,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자 저가격으로 버티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지에서 노동자를 대량으로 수입했으나 지금 다 망하고 말았다. 그 결과 산업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백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만 남아 ‘저놈들 때문에 우리 일자리가 사라졌다.’며 싸우고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독일은 개발도상국과의 저임금 경쟁을 일찍 포기하고 디자인에 투자하고, 숙련 노동자 키우고, 고급 섬유와 고기능 기계 개발하고, 자동화하고 해서 지금도 세계 5대 섬유 수출국 중 하나가 되었다.

너무 노조편만 드는 것 아닌가. 영국의 ‘망국적 노동 운동’을 타도한 게 대처수상이라고 언론에서 말하는데 일리도 있지 않나.

대처 수상이 영국 경제를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일은 노조를 약화시켜 영국 기업의 氣를 살린 것이라고 우리나라 재계나 언론에서 많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영국병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 나라 경제를 지배해 온 것이 금융 자본이라는 데서 찾아야 한다. 예컨대 영국의 산업 자본(제조업) 입장에서는 파운드화가 약세인 것이 유리하다. 그만큼 자국 상품을 해외 시장에서 저렴하게 팔 수 있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파운드화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금융 자본의 힘이 산업 자본보다 훨씬 강하다 보니 결국 파운드화도 영국 경제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강세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영국 제조업들은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영국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최우선시하는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조다. 기업들이 주주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다 보니 계속 단기적 이익만 추구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장기적 투자나 기업 운영은 포기한 것이다. 영국병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영국 노조들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산업의 역사가 워낙 오래되다 보니 직능 노조가 엄청나게 발달한 나라가 영국이다. 한 사업장에 심지어 노조가 대여섯 개씩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경영진 측에서 노조들과 겨우 협상을 마무리해도 사업장 내 노조 중 어느 한 곳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해 버리면 파업이 터지고 하는 일들이 많았다. 따라서 영국의 노동조합 구조나 60~70년대 강성 노조 지도자들의 ‘무조건 투쟁’분위기도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복지시스템이 부실하기 때문에 노동 시장에서 한 번 떨어져 나가면 인생이 끝장난다는 인식이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산업 로봇과 같은 신기술을 도입한다고 하면 목숨 걸고 파업하는 것이다.

한국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997년까지 대기업 같은 사업장에서는 종신 고용에 대한 암묵적 약속이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의 경우 아무리 노사 관계가 대립적이라 할지라도 50~60대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암묵적 약속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로봇 도입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적었다. 또 로봇을 도입할 때도 로봇 때문에 일거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회사측에서 전직 훈련을 시킨 뒤 다른 라인에 배치해 주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 재벌, 언론이 합세해서 ‘고비용·저효율 경제 타파하자.’며 노동자들을 대폭 해고해 버렸고 현대차도 그랬다. 아마 30%인가 잘랐다. 바로 그때 완전히 믿음이 깨졌다. ‘내가 이 회사에서 평생 동안 일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이제는 장기적으로 이 회사를 위해 복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노동자들이 갖게 되었고, 회사 측에서도 노동자를 부려먹다 필요 없어지면 자르면 된다는 단기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 경영이 안 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 파업 많이 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식이 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정리하면 과거엔 일본식으로 일종의 종신 고용제가 작동되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스웨덴처럼 사회보장과 사양 산업의 퇴출 노동자들을 직업 훈련을 시켜 성장 산업에 다시 취업시키는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으로 전직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니 결국 고용 유지가 생존의 문제로 등장하기 때문에 목숨 걸고 저항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최근 KDI(한국개발연구연)에서 국제 경쟁력 심포지엄을 했는데, 한국·중국·일본에 대한 재미있는 비교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거기서 세계은행과 하버드 대학 소속 연구자가 공통적으로 일본에서는 아직 종신 고용 제도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비정규직도 우리나라처럼 심각하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도 그리 심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일본의 노무라 경제연구소에서 일본 기업 500곳을 두 부류로 나눠 설문조사를 했는데, 하나는 동아시아 위기 이후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를 본격 도입한 기업들이고 다른 하나는 종신 고용제 등 일본의 고유한 기업 모델을 보존하고 있는 기업들이었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기업이 소니라면 후자의 대표적인 기업은 도요타와 캐논이다. 그런데 전자보다 후자의 경영 상태가 훨씬 낫더라는 것이다. 소니는 한국의 삼성에게 밀리고 있는데, 도요타와 캐논은 지금도 굉장히 잘 나가고 있지 않느냐?
2004년 이후 일본의 제조업이 부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부쩍 많이 들리는데 그 이유는 일본 기업들이 지난 장기 불황 중에도 R&D 투자를 엄청나게 했고 노동자들을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동안의 R&D 성과가 이 같은 기업 정책을 통해 충성도 높은 노동자와 결합되면서 일본 경제를 다시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노사 간에 신뢰가 형성되어 있으니까 전환 배치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생산성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소비자들은 메이드 인 재팬은 사지만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는 안 산다. 마찬가지로 메이드 인 코리아인 삼성 제품은 사지만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소니 제품은 사지 않는다. 물론 일부 사양 산업이 중국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대안은 아니다. 지금 당장 급하다고 모두 중국으로 몰리면 이후 한국의 산업은 어떻게 되겠나? 국내 산업을 고부가가치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싼 가격으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의 한국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일본 제품보다 비싸도 더 잘 팔리게 해야 한다. 영국 섬유 산업의 경우처럼 쉬운 길은 잠깐은 괜찮은 것 같지만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중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고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는 전략은 단기적으로 우리 경제에 유리할 수도 있다. 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까. 그러나 이런 단기적 처방에만 의존하다간 결국 업그레이드를 못해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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