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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일 10시 13분 등록

영희야. 이번 휴가는 참 뜻 깊구나. 중학교 1학년인 아들아이와 둘이서만 삼박 사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여행을 더 편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웬만한 것은 모두 차에서 해결을 했다. 아이에게 아빠와의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 차에서 자고, 물이 있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며 밥을 지어먹었지. 늘 바빠 아빠와 서먹하기도 했던 아이가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것을 보니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한 살 아래였던, 총명했던 너는 혹시 기억하고 있을까? 아주 가끔씩 먹을 것을 사들고 집에 오시던 아버지. 나는 이상하게 엄마는 기억이 나는데, 아빠 얼굴은 아슴아슴하다. 네가 여섯 살, 내가 일곱 살 때 그렇게 헤어진 후로, 36년이라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기억하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지. 이번 여행길에서도 네 또래의 여성을 만나면, 혹시 나와 닮지는 않았는지, 이름이 영희는 아닌지 물어 보았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시설에 맡겨져 자란 나는 우리가 살던 집에 더 일찍 가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열두 살 때부터 꿈을 가졌던, 경찰 공무원이 되고자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코피를 쏟으며 준비를 하던 어느날. 나는 그 동네를 지나던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엇엔가 이끌린 듯 그 언덕의 꼭대기, 까만 나무 판잣집을 밀고 들어섰다. 너와 내가 엄마와 살았던 그 집, 달랑 방한 칸에 쪽마루와 부엌이 있던 그 집에서 어떻게 다섯 식구가 살았을까 놀라울만큼 작은 집이었다. 그 집 마당을 서성이고 있자 집주인 아저씨가 나오셨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러 주셨어.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내가 그 고장의 시설에 들어가 살고 있을 때 나를 보러 그곳에 오셔서 먹을 것을 사주고 가신 적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집주인 이었을 뿐인 아저씨도 나를 보러 왔었는데 왜 그들은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일까 의문이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너외에 한 살 된 여동생이 더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와 그 동생은 바다가 있는 도시의 시설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나를 그 집에 방치해 두고 떠난 것일까? 일곱 살의 사내아이는 클만큼 컸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날 아저씨는 생선좌판을 놓고 장사하던, 시장의 엄마를 알던 지인들에게 나를 데려 가셨다. 그곳에서 엄마를 더 큰 도시에서 만났다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이 이른대로 찾아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다. 이미 분명한 삶의 지표가 서 있었다. 부모와 같이 살아도 부모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나이였을 텐데 스스로를 돌보면서 나는 누구보다 일찍 철이 들어 있었다. 엄마를 찾고 싶다는 마음 보다는 엄마 없이 살 수 있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루아침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 우리 가정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한참 후에 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실수 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수소문을 해서 어머니를 만났다면, 적어도 너희들 소식은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진 것이다. 너는, 또 막내 동생 영미는 어디서 자랐을까. 이름은 그대로 인지도 몹시 궁금하다.

나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대로이고 성도 같은 김씨인데 다만, [春川] 춘천 김씨이다. 취직을 하려고,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갔더니, 호적에 아무도 없고 달랑 나 하나더구나. 시설에서 만들어 준 거였지. 세월이 흘러 첫 아이가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려하니 동사무소 창구직원이 고개를 갸우둥하며 그런 본도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호적에 있지 않느냐고 대꾸를 했지만, 춘천 김씨는 우리 가족뿐이니 그런 반응은 당연 한 것이었다.

내 생일은 8월15일 광복절이다. 잊지 말고 생일상을 챙겨 먹으라는 어느분의 배려로 그렇게 호적에 올려졌고, 그분 바람대로 올해 생일에도 아이들의 선물과 아내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었다. 영희야. 우리는 왜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을까? 참 궁금한 것도 많았고, 원망도 많았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영희야. 나는 너를 찾는 것이 오빠로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2008년 4월 KBS의 그 사람이 보고 싶다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살던 집도 KBS 직원들과 다시 찾아 가보았다. 이젠 재개발로 묶여 아무도 살지 않지만 그 집은 아직 거기에 있더구나. 여러 과정을 거쳐 그 프로가 방송된 지 일 년이 지났는데 혹여 기대하고, 많이 기다렸는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우리가 헤어진 지 36년 전이지만, 나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이름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너는 네 이름을 잊은 거고, 어머니와도 연락이 닿지 않고 살아 온 것일까?.

어릴때, 오빠는 다음에 너를 만나면 너를 지켜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었다. 우리가 어린 아이여서, 힘이 없어서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빠는 넉넉하진 않지만 대한민국의 경찰이고, 사람들과 늘 함께 하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내가 발디딘 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일을 하려하고, 그냥 경찰관이 아니라 훌륭한 경찰관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마음이 해이해질 때는 1호봉의 꿈을 키우며 경찰관이 되려고, 공장에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던 시절을 떠 올린다.

영희야. 너에게는 오빠가 사랑하는 한결 같은 새언니도 있고, 고모라고 불러 줄 조카들도 둘이나 있다. 만약에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또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면, 다 함께 어울려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우리의 뿌리를 알 수는 있겠지. 그때까지 영희야, 건강히 부디 살아있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생이 끝나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서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꼭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영희, 영미, 늘 너희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오빠가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오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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