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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5일 18시 35분 등록

 

8 8) 자다르 종탑에서 만난 슬라비차 라둘리츠(Slavica Radulic)

  

비잔틴 양식의 빨간 서클 지붕으로 유난히 눈에 띄던 성 도나트 성당 옆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유서깊은 또 하나의 성당이 있다. 이름하여 성 아나스타샤 성당. 그 성당에는 종탑이 부속 건물로 자리하고 있는데 자다르 고성 안에서 가장 높은 탑이어서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의 전망을 보려고 사람들은 그 탑으로 몰려든다. 우리도 전날 밤 보름달 축제 후의 여흥을 즐기려고 그곳에 갔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탑은 문이 닫혀 있었다.

 

그 다음날 그곳에 다시 갔다. 낮의 자다르는 은은한 조명 아래 빛나던 밤과는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성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전날 밤에 오르지 못했던 종탑에 오르는 것이었다. 10쿠나(우리나라 돈으로 2,500원 정도)짜리 표를 파는 30대 아줌마는 올라가면 아주 멋진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던지는 의례적인 인사겠지만 그녀의 순한 인상과 함께 그 인사는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말대로 탑 전망대에서 보는 풍광은 특별했다. 전망대에서 나는 양 팔을 벽에 올리고 턱을 괸 채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다 보았다. 아드리아 해의 공기는 먼지 한 톨 달려들 틈 없이 청명했다. 코발트 원색으로 빛나는 하늘은 에머랄드 빛 바다 위에 떠있는 하얀 요트들과 더할 수 없이 잘 어울렸다. 맑은 공기를 가르고 직진하는 정오의 햇빛이 그대로 머리 위로 쏟아졌다. 너무 더워 내려오는 길에 그녀 책상이 놓여있는 뒤 공간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앉았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도록 설계된 종탑 건물 안쪽은 제법 시원했다. 퍽 붐비지는 않아도 계속 발길이 이어지는 손님들에게 표를 열심히 팔고 있는 그녀를 아드리아해 대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간간히 손님이 뜸한 틈을 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에게나 다가가 묻는 것은 이제 나에게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 슬라비차는 인상 만큼이나 순박한 여인이었지만 노동으로 하루의 삶을 정직하게 채워야 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런 고달픈 일상은 크로아티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가 거기서 표를 파는 것은 작년부터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일로 두 번째 여름을 맞는 셈이다. 여름이란 단어는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름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시즌이고, 이 장사는 한 철 장사이기 때문이다. 10월이 되면 관광객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아나스타샤 성당의 한 교구의 신자다. 그녀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교회의 신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착실한 신자들에게 종탑 매표소에서 일할 기회를 준다. 갈수록 구직난이 심한 탓에 그나마 교회는 한 사람에게 오래 일을 줄 수도 없다. 그러니 하루 7시간 일하고 4백 유로 월급을 받는 일에 불과하지만 다음 여름에도 그녀가 거기서 그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그녀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달라고 했다. 다시 오게 되었을 때 그녀를 찾을 길이 묘연해지면 안될 것만 같아서.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했지?’

‘That might be a long story!’

 

어느새 마음을 열고 서로 친해진 우리는 막 웃는다.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나 여기 며칠 머물러야겠네.’

그래, 그럼 우리 엄마가 하는 민박에서 머물면 되겠다.’

 

그녀가 나와 이야기에 빠져있는 동안 몇 사람이 그냥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표 값은 10쿠나랍니다.’

 

그녀 대신 내가 소리쳤다. 올라가던 사람들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내려와서 표를 샀다. 그녀가 오른 손 엄지를 추켜올리며 내게 윙크를 보냈다. 그녀는 노트에 열심히 메모하는 나를 위해 불을 하나 더 켜주었다.

 

어머니가 시내에서 민박을 하기 때문에 그녀가 일하는 동안 8살짜리 딸 애는 하교 후에 할머니 집에서 놀 수 있다. 남편도 일을 하지만 해마다 오르는 물가가 만만치 않아 여름 동안 일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성당 매표 일이 끊어지는 겨울철에는 다른 일을 한다. 그곳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다. 그녀 역시 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일부러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마냥 교사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닥치는대로 일을 한다. 가끔 특별 교사로 일해달라는 곳도 있지만 주로 섬 학교들이다. 짧은 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오랜 시간 배를 타야 한다. 소비한 시간과 교통비를 빼면 그녀가 받는 보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딸이 보고 싶네. 엄마 닮았으면 이쁠텐데.’

난 안 이뻐. 그렇지만 우리 딸은 이쁘지.’

 

슬라비차는 내가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자꾸 눈을 감았다.

자꾸 눈을 감게 돼. 사진이 잘 안나와서 나는 사진을 잘 안찍어. 사진찍는 게 싫어.’

아니야 잘 찍을 수 있어, 웃어봐.;

어떻게 하면 사진이 잘 나오게 할 수 있는데.’

거울 보고 치즈~ 이렇게 연습하면 돼.’

 

그 때 거짓말처럼 내가 보고 싶다는 그녀의 딸이 사촌아이와 함께 나타났다. 사진을 찍어 보여주니 수줍어하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딸 아나는 얼굴이 조그맣고 눈이 초롱초롱했다.  

 

헤어지는 나를 보며 그녀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한가할 때 다시 꼭 놀러 와. 우리 엄마 방은 비수기엔 아주 싸.’

 

나는 그녀가 집에 돌아갈 때 꼭 사가라고 적어준 그네들의 종합 스파이스 베게타(Vegeta)와 여자들을 위한 달콤한 술 마라스키노(Maraskino), 그리고 그리오테(Griotte) 초콜릿을 끝내 사지 못했다. 크로아티아를 다시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다음 방문 때에는 자다르에 꼭 들러 그녀의 어머니 민박집에서 하루 묵을 것이다. 아나를 위해 한복 인형도 하나 사가지고...   

 

 

8 10) 시베니크에서 만난 드라간 수바기츠(Dragan Subagic) 부부

 

자다르와 스플릿 사이에 위치한 도시 시베니크는 유명세를 타는 앞의 두 도시 탓에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곳이다. 이미 여러 도시를 돌고 난 이후라 나 역시 시베니크 방문을 앞두고, 비슷한 유적이 있고 비슷한 골목과 카페가 있는 도시 하나 더 들려 무엇 하나 하는 자조 어린 심정이 되어 있었다.  

별 다른 기대 없이 건물들 속으로 들어간 나는 순간 당황했다. 어디가 어딘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에서 나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지도를 아무리 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알기가 어려웠다. 미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미로의 대명사로 알려진 베니스의 골목들은 시베니크에 비하면 차라리 낭만처럼 여겨졌다. 시베니크의 골목은 굴곡이 심했다. 어딘가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쉴새 없이 변모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거리는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설사 막혀있다 해도(dead end) 돌아서 다른 길을 따라가면 출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는 순간 나는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러자 골목을 헤매는 일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색다른 재미가 되었다. 그렇게 헤매다 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찾던 바로크식 중세 정원인 로렌스 가든이 눈 앞에 나타났고 세인트 제임스 대성당도 나타났다.

 

제임스 대성당으로 내려가는 골목에는 고색 창연한 카페들이 즐비했다. 코너를 돌자 구석의 작은 카페가 눈길을 확 잡아 끌었다. 야외 공간에 나와있는 몇 개의 테이블 중에서도 맨 안 쪽의 테이블로 눈이 갔다. 그곳에는 멋진 중년 커플이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아침 10가 지나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앞에 빈 의자를 가르키며 내가 말하자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먼저 살핀 남자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

예 그러시죠.’

 

남자 눈에는 의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외모가 전혀 다른 조그만 동양 여자가 적극적으로 다가서니 거절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미인이 조용히 (그러나 영화배우처럼 아주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그 남자만 있으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상황을 즐기는 듯한 그녀의 묘한 표정에 힘입어 다시 물었다.

 

두 분 너무 멋지십니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그거 이상한 포르노 웹 잡지 같은데 느닷없이 실리는 건 아니겠죠?’

한국의 유명한 시네마 잡지에는 어떻겠습니까. 두 분이 꼭 영화배우 같으십니다.’

나는 아니고 우리 아내는 그 정도는 생겼지요하하하.’

 

그들은 참으로 다정해보였다. 서른과 스물 아홉 먹은 두 아들을 두었다는 이 부부는 30년 이상을 한 결혼으로해로해왔다고 했다.

 

작은 애가 29살이라고요? 아니 그럼 30살처럼 보이는 내 앞의 그대들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과장된 제스처로 너스레를 떠는 나를 보며 드라간도 농담을 했다. 처음에 보였던 의심쩍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들도 아들이 아니라 막내 동생 아니냐고 하지요.’

그렇게 말해도 다 믿을 거예요. 두 분 정말 젊으세요.’

 

싫으면 쿨하게 헤어지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한 결혼 안에서 이렇게 오래 해로하는 커플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그러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성대하게 치르는 결혼 25주년이나 50 주년 행사 같은 것도 머지 않아 박물관의 자료로만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이들 부부는 다정할 뿐만 아니라 둘 다 외국 잡지의 화보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카페의 오밀조밀한 풍경보다 이들의 모습이 내 눈을 더 사로잡았으니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하랴. 나는 이렇게 잘 생긴 사람들만 보면 아름다운 조각품을 감상하듯 하염없이 쳐다보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몰래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은 기분 나빠하지만 너무 멋지다, 정말 작품 같이 생겼다고 칭찬하면서 쳐다보면 은근히 좋아한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이스 당신을 만나려고 했는지, 이상하게 이틀 전에 한국 사람 만나는 꿈을 다 꾸었지 뭐예요?'

그레잇, 그거 정말이예요?’

 

그 때부터 우리의 대화가 유머 모드로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정작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름이...?

드라곤()이 아니고 드라간이오, 드라간 수바기츠, 내 아내는 이레나구요

여름 휴가를 보내는 중인가요?’

아니요, 여기 살아요. 휴가는 벌써 다녀왔어요.’

 

우리는 다시 휴가 보내는 방법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여긴 좋은 섬이 많으니까 무인도에 두 분만 가셔서 쉬다 오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그런 건 젊을 때 다 해봤지. 보트 하나 빌려서 섬에서 오붓한 휴가를 자주 즐겼어요.’

이 시간에 이런데서아직 휴가가 안 끝났나봐요.’

아니오, 일 시작하기 전에 잠깐 커피 한 잔 하러 나온 거요.’

 

사무실에서 손수 타먹는 일명 다방 커피도 맛있지만 이런 카페에 나와 돈 좀 내고 마시는 커피가 운치는 더 있어 보인다. 유럽의 여름은 어디를 가나 거리에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햇빛이 잘 드는 카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들은 전혀 분주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커피 한 잔과 조각 케익을 앞에 놓고 망연히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와 수다를 떤다. 드라간과 이레나 역시 매일 아침 카페에 나온다. 카페에서의 모닝 커피 한 잔은 그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이다. 그들의 표정은 정말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굳이 휴일이 아닌 평일 아침에 카페에 나와 카푸치노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이들의 여유가 부럽다. 인생 별 거 있나. ‘별 거인 거처럼 생각하니 그 많은 잡음과 스트레스가 생기는 거겠지. 어쩌면 일 분 일초라도 아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믿는 내 생각이 내 인생을 사육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 때 드라간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들이예요. 두 놈 다 지금 자그레브에 가 있어요. 저기 보세요(그가 가르키는 카페 창문에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락 밴드 U2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다). 엊그제 U2가 자그레브에서 공연을 했거든요. 그거 보러 올라간 거죠. 공연실황 들어보라고 전화를 했더라구요. 그 핸드폰이 어디건지 알아요?’

알 거 같아요, 잠깐만, 그래 맞다, 삼성 애니콜!’

내 흥분해서 소리치는 순간 바로 드라간이 이어서 외쳤다.
빙고!!’

 

영어가 안되서 우아하게 모나리자 미소로만 일관하던 이레나도 빙고! 할 때는 드라간과 나의 손바닥을 힘껏 마주쳐 주었다.  

 

내 차 역시 기아 소렌토예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한국 경제에 기여를 많이 하네요.’

저 역시 마찬가지죠. 여기에 한국 관광객을 많이 보낼 생각이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아까 찍은 사진 섹시 화보로 웹에 떠돌아다니는 건 아니죠?’

벗지 않고도 자신이 섹시하다는 걸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은데요.’

농담 여세를 몰아 다시 한 번 주의를 주는, 나름대로 치밀한 드라간이다.

 

일 하러 가야한다며 드라간이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가 내가 마신 미네랄 워터의 계산서를 가져간 모양이다.

 

내 빌(bill)이 어디 갔지?’

재떨이와 물병을 들며 빌을 찾고 있는 내게 그가 말했다.

 

바람에 날라가던 걸!

 

사전에 내가 내겠다고 미리 말하지 않는 한, 각자의 것은 각자가 계산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그네들 풍습이건만 그는 벌써 내 빌까지 계산을 한 것이다.  

 

혹시 드라간은 한국의 전통에 대해 이미 꿈에서 경험한 게 아닐까.

 

 

8 12) 블레드 호수의 뱃사공 블라츠(Blaz)

 

내가 눈부시게 바라본 또 하나의 남자를 소개해야겠다. 그는 블레드 호수의 플레트나(pletna) 뱃사공이다. 나는 그 남자 블라츠를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블레드 호수에서 우리가 타게 될 배를 수배하다 배 주인인 그를 알게 된 것이다. 블레드는 나의 초행이라 이메일과 전화로 그와 여러 번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래도 내가 흡족하게 안심을 하지 못하자 그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어디에서 우리가 배를 타야하는지 직접 알려주겠다고 했다. 블레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먼저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배를 타기 전에 호텔로 와서 우리를 인솔해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블라츠입니다하면서 다가온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동안 상상하던 뱃사람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야 했다. 그는 일단 배(belly)가 나오지 않았고, 젊었다(오해하지 마시라. 그가 아주 어리다는 것이 아니라 전화로 상상한 것보다는 젊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이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게 매력 있는 아저씨는 이 세상에 아주 많다). 그의 몸에는 군살이 전혀 없었고,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탄력이 넘쳤다. 더구나 그는, 뱃사람의 덕목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지성미와 귀티까지 갖추고 있었다. 뒤로 묶은 긴 머리와 선글라스는 그를 갸냘프고 단아한 신사처럼 보이게 했다. 싱겁게 큰 사람보다 적당히 작으면서 매력까지 넘치는 블라츠는 나의 모성을 마구 자극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그가 노 두 자루로 자신의 플레트나를 마술처럼 부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를 향한 나의 모성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플레트나는 블레드 호수 가운데에 떠있는 작은 섬으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아담한 놀이용 나무배다(앞에 신재동씨가 올린 사진에서 블레드 호수에 떠있는 섬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멋진 플레트나 사진을 감상해보시길..). 지붕처럼 위에 차양을 멋지게 달고 있는 플레트나는 양 측에 대칭으로 긴 의자가 놓여있어 한 쪽에 9명씩, 모두 18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기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 전통 배를, 그것도 18명 정원을 가득 태우고 오로지 한 남자가 노를 저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힘 만으로는 단 5분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호텔에서 부두로 배를 타러 내려오는 동안 나는 블라츠에게서 이 배의 내력을 들었다. 이 배의 첫 시작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블레드 호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조그만 마을 믈리노(Mlino)의 가난한 농부들은 당국의 보호 아래 뱃사공이라는 신성한 직업을 세습하도록 명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십일조를 바치는 대신 일종의 성지인 블레드 호수 섬 내의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오는 순례자들을 섬으로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그 임무는 지금까지 믈리노 마을 사람들의 세습 직업이 되어온 것이다. 블라츠 역시 아버지가 맡았던 배 두 척을 물려받아 생활하고 있다.

 

8살 때부터 아버지가 노 젓는 모습을 보고 배운 블라츠는 18살에 면허를 딴 이래 지금껏 20년 가까이 뱃사공으로 일하고 있다. 일이 없는 겨울철에는 슬로베니아의 협곡의 산악 하이킹이나 스키를 가르치는 스포츠 강사로 일한다.  

 

블라츠가 노를 젓는 모습은 완전히 예술이었다. 두 팔을 휘저어 공중으로 올렸다 내릴 때마다그의 팔 근육들은 다부지게 리듬을 타며 움직였다. 노를 잡고 있는 동안의 블라츠는 결코 모성을 자극하는 연약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결코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았다. 그러나 배는 유유히 균형을 잘 잡은 채로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노 젓는 기술은 오래도록 단련된 기예에 가까웠다. 그 때 사부는 그에게 옷을 벗어보라고 하셨다. 

 

성당에 참배하러 가시는 길인데 불경하지 않겠어요?’

그는 재치있게 사부의 말을 거절하였다.

그럼 이따 돌아오는 길에는 꼭 벗는 겁니다.’ 
한 마디 던지는 걸 잊지 않은 건 역시나 나였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가 웃었다. 아름다웠다. 블라츠의 웃통을 벗어보라는 사부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블라츠의 노젓는 모습에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는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의 팔 근육 뿐 아니라 셔츠 속에 숨겨진 그의 몸통 근육 전체를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것은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의 조각품을 보고 싶어하는 심리와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더구나 그는 우리 앞에 살아 움직이는 현존하는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들의 염원을 배반하고 블라츠는 돌아올 때도 웃통을 벗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날 밤 내 꿈에 나타나 밤새 아름다운 근육은 움직이며 계속 노를 젓고 있었다.(무슨 에로틱 소설 버전이 되어버린 느낌? 푸하하하~~) 

IP *.248.7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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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09.08.25 19:38:32 *.248.235.10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를 읽는것 같군요.
같은 시공간에서 이렇게 폭넓은 유영을 하다니.......

나는 로이스의 웃는 얼굴이 더없이 아름답던데.... 그대가 만난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 같아요.

프로필 이미지
2009.08.26 19:56:39 *.145.58.162
와.. 멋진 글 ^^
좌샘 이야기처럼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는데도 이렇게 풀어내는 건 다를 수 있네요
이번 여행에서 로이스 선배한테 홀딱 반해버렸어요~ 아마 저 말고도 반한 사람 많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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